낙엽 / 안희선 낙엽 安熙善 신경쇠약의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부터 사는 길 위에 표적을 세우는 행위가 초라하기만 하다 의도적으로 눈 먼 사람들은 최후의 담화에도 별 관심이 없고 그 밖의 세인(世人)들은 물웅덩이로 질퍽한 세상에 의미도 없는 돌 던지기나, 땅 가르기에만 열중할 뿐 근심어린 삶의 .. 시조 & 시 2019.09.14
찬 비 내리고 / 나희덕 찬비 내리고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 시조 & 시 2019.09.12
마흔 살의 시 / 문정희 마흔 살의 시 문정희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 시조 & 시 2019.09.10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시조 & 시 2019.09.02
삶 / 문무학 삶 문무학 ‘삶’이란 글자는 사는 일처럼 복잡하다. ‘살아감’이나 ‘사람’을 줄여 쓴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글자를 줄여도 간단해지지 않는다. # 군더더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으니 삶이란 하늘의 별처럼 무한의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 시조 & 시 2019.08.31
내가 가장 아프단다 / 유안진 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 못 아프고 잘 못 앓는단다.. 시조 & 시 2019.08.23
인연 / 도종환 인연 도 종 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 시조 & 시 2019.08.20
늙은 조개 / 김순아 늙은 조개 김순아 찬거리로 사다 도마 위에 올려놓은 조개 한 마리 죽은 듯 입을 앙다물고 있다 세월의 무늬가 짙게 새겨진 노인처럼 칼끝으로 위협해도 꿈쩍 않는다 흔히 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죽은 조개라고 하지만 실은 입을 열면 혼자 삭여온 말들 거침없이 쏟아질까봐 늙은 몸 방.. 시조 & 시 2019.08.10
바람부는 날에는 / 김종해 바람부는 날에는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시조 & 시 2019.08.01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 시조 & 시 2019.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