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기름 주유소 / 고경숙 꽃기름주유소 고경숙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 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컹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 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 담고 있.. 시조 & 시 2019.12.18
비녀산 / 김지하 누군가의 글에 있는 말이 생각납니다 기쁨은 웃음으로 승화되어 허공으로 날아가지만 슬픔은 가슴 밑바닥 저 깊은 곳에 가라 앉아서 쌓인다고 그렇게 쌓인 슬픔은 강풍이 불거나 소용돌이가 생기면 흙탕물처럼 다시 피어 오르게 마련이지요 마음이 강하고 의지가 굳센 사람이라면 그 흙.. 시조 & 시 2019.12.02
사랑도 그러하다 / 안희선 사랑도 그러하다 / 安熙善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향긋하고 좋다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을 잃고나서 처음부터 다시, 그 사랑의 순서를 밟는다는 건 정말 너무도 힘든 일이기에 시조 & 시 2019.11.15
아직 / 유자효 아직 유자효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 시조 & 시 2019.11.12
나무 되신 아버지 / 유영호 나무 되신 아버지 유영호 햇빛 가득한 거실 창가 흔들의자에 앉은 아버지는 군복에 총을 잡고 잠이 드셨다 몇 년 전 정신을 놓으시고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더니 언제부턴가 한국전쟁을 지휘하신다 아버지의 손톱을 깎아드렸다 기억은 오래 전에 토막이 나 거미줄로 흔들리는데 더 키.. 시조 & 시 2019.11.08
내 나이는 몇 살인지 / 유영호 내 나이는 몇 살인지 유영호 생물학적으로는 환갑이 넘어 머리엔 서리가 그득하고 주름이 깊게 폐인 얼굴에는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있다 물리학적으로는 주말마다 깊은 산골로 약초를 찾아다니고 매년 한두 번씩 지리산을 종주하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다 사회학적으로는 40대부터 백.. 시조 & 시 2019.10.31
빈 항아리 1 / 홍윤숙 빈 항아리 1 홍윤숙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을 담아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 시조 & 시 2019.10.24
외로운 여자들은 /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 시조 & 시 2019.10.24
흔적들 / 박후기 흔적들 박후기 연필로 시를 쓴다 연필심은 연필의 뼈, 살을 깎아내 뼈로 글씨를 쓴다 아침에 칼을 들고 마음 끝 갈아 세워도 저녁이면 다시 무뎌지는 게 필생이다 앞날 흐릿해 힘주어 눌러쓰면 뒷장에 배기는 흔적들, 어쩌면 나는 흔적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군더더기 어쩌면 .. 시조 & 시 201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