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야기

임마누엘 칸트 의 일생 ...

낙동대로263 2009. 8. 19.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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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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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 책을 보다가 결국 가서 닿는 종착역은 칸트 였습니다.

물론, 칸트철학은 나중에 [니이체] 에 의해 상당부분 베일이 벗겨지지만 .....


저는 생각했습니다.


근세의 수많은 철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칸트를 기점으로 해서 여러가지 이론을 정립해 갔었는데 ,,, 

이 칸트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1770년대에 쓴 그의 3 대 저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은 지금도 해석이 안되어서 논란이 분분한 거대한 절벽인 만큼 그러한 책을 쓴 사람의 일생도 아주 파란만장했으리라고 여기고 그의 일생을 알아 본 결과......


 

 

탄생 ; 1724. 4. 22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임종 ; 1804. 2. 12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 평생 태어난 도시를 떠나지 읺았답니다.... 저하고 비슷합니다....

유언 ; 이제 되었다 (Es ist gut)  ----------->  대단하고 무서운 유언이죠 ? 이런 유언할 수 있을까요 ?

부모 ; 부친은 말 조련사, 모친은 평범한 주부....

형제 ; 6남매중 맏아들, 4명의 여동생, 1명의 남동생....

결혼 ; 평생 독신으로 살았음  --------------> 이 부분도 거의 저하고 비슷합니다... 으음 ;;;;

교류 ; 친구가 거의 없음. 형제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었다고 함....25년 간이나....


 

 

부친은 칸트가 야생마 조련사가 되기를 강력히 권고 했다고 하니, 참말로 큰 일 날 뻔 하지 않았나 말이다......


이와 같이 태어난 도시를 떠나지도 않고 평생을 그 도시에서 살았고 거의 집과 직장만을 오가는 단조롭고 따분하기까지 한 일상을 평생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칸트의 산책시간을 보고 이웃에서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칸트는 오로지 공부에 공부만을 계속하다가  ---- 꼭 나를 닮은 듯하다 ----  46살이 되어서야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직장을 제공하여 교수직을 하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직장을 여러 번 제안을 받는다.

 

 

-----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의 교수 자리는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나도 공무원이라는 점에 주목하시라 -----

 

 

직장을 소개받은 하나의 사례를 본다면 ........

당시, 독일통치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칸트라는 철학자를 예쁘게 보고 40살의 칸트에게 베르린대학의 시문학교수자리를 마련했으나 칸트는 자기는 시인이 아니라면서 귀찮다는 듯이 거절해 버렸단다.

그러고는 겨우 고향도서관에서 도서정리를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그 사회적 혼돈의 시대에 오만잡놈들이 주인행세를 하던 엉망진창인 독일을 무력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제국의 대왕이 제공한 교수자리를 거절하다니.....그게 유일하게 간 큰 .... 아니, 간이 배 밖에 나온 짓이었고 그 외에는 도대체 너무도 평범해서 말할 거리가 없는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당시, 도서관에는 칸트가 즐겨 보는 종류의 책은 너무도 따분해서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제일 구석의 가장 높은 서가에 보관했기에 칸트는 사다리를 끌고 가서 그 위에 대롱대롱 앉아서 그 책들을 끝도 없이 읽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도서관의 다른 직원들은 그 꼴이 하도 기가 막혀 두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한다.

저 인간은 원래 저러니 그냥 냅둬라 .... 했다고 한다.


칸트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쓴 논문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그 제목이 [활력의 참된 측정에 관한 이론들] 이었다.

그게 22살 되던 해였으니 칸트는 일찍부터 철학자로서의 기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당시의 [신이 생명을 부여한다] 는 활력론의 활력을 측정하려고 하는 시도였는데 아마도 칸트는 생명을 신이 주기는 한다는 것을 믿었던 것 같다.   측정을 하려 했으니깐...


어쨌든 이 논문은 어찌된 셈인지 ... 아마도 칸트가 상류사회에 기반이 전혀 없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 종종 좌중을 웃기는 소재로서 활용되어 칸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은 그는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고 여자들도 그에게 오라지게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  나는 완전히 반대다.. 나는 여자에게 관심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  이 모양이다 ------

 

 

칸트는 게르만 민족의 남자로서는 너무 작은 155 센티의 작은 키에 바짝 마른 앙상한 체구, 볼품없는 인물로 인해 이성의 관심을 끌 외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친구와 주변사람들의 결혼 상담은 도맡아 했는데 그가 내 세운 결혼은 한결같이 미모보다는 돈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미모의 매력은 곧 사라지지만 돈의 매력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다.... 그 당시에도 돈은 좋은 것이었나 보다....


하기사 맞는 말이지.....돈은 새끼를 치지만 이쁜 여자는 앙살만 심하니.  칸트가 생각 잘했지....  이이이이이건 농담입니다 ^^;;;;

 

 

 


그의 하루일과는 너무도 단순 반복적이어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동으로 서로 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평생을 똑 같이 행동했으니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것이 철두철미한 자기관리인지, 아니면 지독한 지겨움의 징표였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전기 작가들은 지금도 칸트의 그러한 행적의 이유를 밝히려고 애 쓴다고 한다.

대학에서의 강의 때와 손님이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고 하며 모든 생활을 하인이 시간에 맞추어 알려주면 말없이 일어나서 행동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칸트의 산책] 도 람페 라는 하인이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하루는 이러했단다...


4시 55분 ; 기상.....

5시 ; 홍차 2 잔, 담배, 잠옷 입은 채 공부..... 아침식사는 아예 먹지 않음.....

9시 ; 대학에서 강의.....

12시45분 ; 점심..... 유일한 식사다운 식사시간..... 보리빵 두 조각과 버터, 야채 샐러드....

16시 ; 산책 나감   ------->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산책시간에 시간을 맞추었다고 한다.

22시 ; 취침.....저녁은 거의 먹지 않음  ----> 도대체 먹는 게 없으니... 깡마를 수 밖에 ...


30 년을 이런 생활을 했으니..... 아마도 칸트는 따분함, 지루함,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런 것들에는 도무지 감각도 느낌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여자가 같이 살기에는 참으로 재미없는 .... 그런 사람인 것이다 

 

 

----- 난 정 반대인데에도 여자가 붙지 않는다. 불가사의하다 ----

 

 

또 칸트는 대인기피증이 심했다고 한다.

칸트의 명성을 듣고 당대의 문호이며, 통일 독일 제국의 재상 자리를 제의받고 할까말까를 고민하던 [쾨테] 가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대꾸도 하지 않아 쾨테가 노발대발했다고 하니 말이다..... 보통 사람이면 줄을 대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일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나를 닮은 것 같다... 음 .... 믿거나 말거나 ....


칸트가 일생동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오로지 하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분석이었다.

그게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자라나 하는 것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지루한 인생이겠고 어찌 보면 진정 제 하고 싶은 대로 산 사람이며 또 어찌 보면 멋있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전기작가들 사이에서도 그 부분은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다.....


칸트는 그 당시 사상계의 양대 산맥이던 [합리론] 과 [경험론] 둘 다 비판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근대라고는 하나 중세기의 교회의 권위가 사회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그 당시에, 교회의 그러한 위세 속에서도 신상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이 희안하고도 괴팍하며 이해가 안 되는 사람에 대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호기심이 그를 보호해 주었고 교회의 이론에 반대하는 [경험론] 도 같이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대왕이 하사한 교수직도 마다한 칸트를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나마 어여삐 보았기에 그 책도 쓸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정작 칸트 본인은 모르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칸트가 귀엽고 재롱동이 같다는 건방진 생각도 든다....


어쨌던 교회에서는 칸트를 어찌 할 수는 없고, 밉기는 때려 쥑이고 싶을 정도이고.... 하여서, 수도원에서 기르는 모든 개에게 [칸트] 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로 하는 등의 시위를 했다고 하니 교회의 분통과 눈흘김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찌 보면 귀엽고 앙증스럽기까지 한 자그마한 그 사람이 현대에 와서도 “절벽” 으로 불리워지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었다니 경탄할 일은 틀림이 없다.


칸트가 쓴 많은 책 중에서 3 대 저서로 꼽히는 그 무슨무슨 비판 이라는 책을 출간해도 동료는 물론, 정치계, 종교계를 비롯한 그 누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칸트는, 동료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단다...


왜 사람들이 쓰다 달다 아무 말이 없나 ?

이 사람아, 글자를 던져서 땅에 떨어진 순서대로 맞춘 책을 알아야 말을 하지....


이 말을 들은 칸트는 무척 실망하고 상심하였다고 하며, 그 대책으로 그 세가지 저서를 해설한 해설서를 없는 형편에 또 돈을 들여서 출판을 하기는 했지만, 이 마저도 완전히 외면을 당했다고 하니, 칸트의 사상과 주장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칸트가 비판한 대상인 우리의 “ 판단력 ” 과 “ 이성 ” 이라는 분야는 그야말로 떨어질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 분야이며, 지금도 그 기원과 생성과 발전에 대한 과정을 알지 못하는 판국인데, 그 옛날에 언급하고 연구하고 발표했으니 그 찬란한 천재적 지적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칸트철학도 나중에 니체의 비판에 직면하지만, 아마 칸트가 살아 있었다면 니체도 칸트에게 당했으리라 생각된다.....


또 하나, 이해가 어려운 일은, 칸트가 죽었을 때, 부모형제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하인들이 곤욕을 치루었다고 한다.........   25 년 동안이나 형제들과 얼굴도 안 보고 살았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아 낸 남동생은 야생마 조련사를 하면서 거지 꼴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칸트는, 현실에 있어서의 모든 인연과 혈연... 등등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고 전기 작가들은 말 한다....


어쨌던간에 .........


많은 비판과 외면, 그리고 조롱 마져도 있기는 하지만 칸트가 [순수] 라는 단어에 부여한 의미는 지금도 그 진실된 의미를 찾고 있는 형편이니 .... 만일, 칸트가 그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철학계는 아직도 그 지적 징검다리를 찾으면서 헤매고 있을 것이 틀림이 없다.

특히 형이상학 분야에서는......

 

 


칸트의 일생을 소개할려고 했는데 그게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재미삼아라도 읽어셨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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