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시

기억할만한 지나침 / 기형도

낙동대로263 2019. 5. 16. 16:20


기억할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더더기


이 시는 과거에 만났던 한 사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동병상련의 아픔을 노래한 시입니다.

울고 있는 사내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침묵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타인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밤 텅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어깨를 들썩이는 사내들이 우리를 어둠 속으로 질질질 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