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시

건강한 슬픔

낙동대로263 2018. 7. 17. 16:01



건강한 슬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


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강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