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이야기

산악인 고상돈의 죽음

낙동대로263 2018. 5. 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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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일본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에 자극 받은 우리나라는 산악연맹 등을 주축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을 추진한다.

1971년 네팔 정부에 입산 신청을 했고, 2년 후에야 겨우 허가를 받는다.


1974년부터 설악산 동계훈련 등 준비 과정이 무려 5년여, 훈련 중에 3명의 대원이 사고로 죽었다..

그 만큼 공격적이고 지독하고도 치열한 목숨을 건 훈련이었다...

김영도 대장 등 18명의 원정대가 출발한 것은 1977년 7월이었다.


그러나 9월 7일 정상 1차 공격조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실한 장비와 체력방전, 산소 부족 등으로 정상 100m를 남기고 포기, 결국 나흘 뒤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무려 46년 전이었으니 그 당시의 장비는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제 2차 공격조는 고상돈과 현지 셀파, 그렇게 단 두명으로 구성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기 전인 6월, 이미 유서까지 써놓았던 고상돈은 출발을 앞둔 9월 12일, 유서에 첨가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꼭 이겨서 돌아가야 한다. 일생의 모든 것을 건 이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건 생명의 파멸을 뜻하는 것이다. 패배란 죽음만큼 괴로운 것이다.”  라고 .... 더 적어넣었다... 

이 사람은 목숨을 건 처연한 각오를 한 것이다.


그는 정상을 정복했을 때의 사진 효과를 생각해서 붉은색 등산복을 준비했다.

그리고 1976년 설악산에서 훈련하다 숨진 동료 대원 3명의 사진을 그 주머니에 넣었다.


9월 15일 오전 5시에 출발한 고상돈과 셀파 펨파 노르부는 7시간 20분의 사투 끝에 낮 12시 50분(한국시간 오후 4시 30분)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다... 그 등정 시간 동안 음식도 물도 없었다. 무게 때문이었다.

어디가 정상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지만 2년 전 중국 원정대가 세웠던 삼각대를 발견하면서 정상임을 확인했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는 그의 감격적인 한 마디는 이때 김영도 대장에게 무전으로 한 말이다.


셀파가 산소 마스크를 쓰고 태극기를 든 고상돈의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정상에 1시간가량 머물면서 동료들의 사진을 만년설에 묻었다 한다.


“떨리는 손으로 태극기를 꽂았다… 사진을 묻고… 중국 등반대의 삼각대를 밟으며,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신비롭고 웅휘한 히말라야의 설봉들을 굽어보며 보낸 1시간 정도의 그 시간은 내 생애 가장 길고도 짧았던 순간이었다. 내 일생 극한의 행복에 겨웠던 시간이었다.” 고상돈은 후에 정상에서의 순간을 그렇게 기록했다.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름으로서 ,,,,

한국은 국가별로는 세계에서 8번째, 등반팀으로는 14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몬순(계절풍) 기간인 9월중 등반과 21일간의 고속 캐러밴 등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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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대륙의 최고봉인 매킨리(Mckinley) 산의 이름이 2016년 1월 1일 부터 ‘드날리(Denali)’ 산으로 바뀌었다.

백인들이 지은 이름을,  원주민이 쓰던 이름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해발 6,194m의 매킨리는 알래스카를 동서로 가르는 알래스카산맥의 주봉이다.


미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알래스카를 방문하는 이날 매킨리의 이름 변경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샐리 주얼 미 내무장관은 이미 지난 28일 이름 변경에 서명했다.


미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사흘 일정 알래스카 방문시 미국의 49번째 주의 지도가 바뀐다"고 전하고 있다.

매킨리의 이름이 바뀐 것은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오랜 청원을 오바마 대통령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드날리’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언어로 '신성함’ ‘위대함' 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매킨리의 원래 이름은 드날리였지만 이 북미 대륙의 최고봉은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이름의 수난이 시작됐다.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덴스모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896년 미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 윌리엄 매킨리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이 산을 매킨리라고 명명했다.

매킨리는 미서전쟁으로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하고 1900년에는 하와이를 병합하기도 한 인물이다.

매킨리 산의 이름은 1917년 이 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알래스카 주는 1975년 국립공원의 이름을 드날리 국립공원으로 바꾸면서 매킨리 산의 이름 역시 드날리로 변경해 줄 것을 미 연방정부에 공식 청원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 의회는 매킨리라는 이름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미 지명위원회는 판단을 유보했다.


알래스카의 청원 40년 만에 오바마 대통령은 내무장관에게 명칭 변경을 지시했다.

지명위원회가 합리적 시간 내에 명칭 변경을 결정하지 않으면 내무장관이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한 법에 따른 것이었다. 

주얼 내무장관은 명칭 변경 명령에서 "매킨리 전 대통령은 이 산을 방문한 적도 없고 어떤 중요한 역사적 관련도 없다" 고 지적했다. 백악관은 "명칭 변경은 알래스카 원주민들에게 드날리의 신성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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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대하고도 험준한 산을 오르기로 고상돈과 대원들은 약속하였다.


그리고 출발하였다 ... 


고상돈과 이일교, 박훈규는 기어코 맥킨리를 정복하고야 말았다.

그 날은 북극권 특유의 지독하고도 강력한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어서 도대체 발을 눈구덩이에서 빼면 날아 갈 듯 하여 일정이 지체되어 하산시간이 좀 늦어진 점을 제외하고는 큰 이상은 없는 날이었다.


3 명은 너무도 심한 폭풍에 견디기 위해 3 명의 몸을 서로 자일로 연결했다.

그렇게 하고는 조심조심 하산하고 있었다.


6000 미터를 막 지났을 즈음...

악명 높은 크레바스 지대에 도착하여 크레바스를 피하면서 천천히 전진하고 있을 때, 코너를 도는 순간 벼락같은 폭풍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면서 대원들을 후려갈기는 바람에 3 명의 몸이 정말로 휙 떠올랐다가 얼음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60 도나 되는 급경사 얼음벽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고 자일과 몸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오른쪽 다리에 자일이 뒤엉킨 이일교의 오른쪽 무릎이 체중과 자일의 견인력 탓에 강하게 뒤틀리면서 관절이 빠져버렸다.. 

그 지독한 고통이 어떤 것일지 상상이 되는가 ?  

무릎이 비틀리면서 강제로 뽑혀나가는 순간의 전율할 고통에 휩싸인 이일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

그 고통은 과연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것이었을까 ?


그 지경이 되었지만 재앙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구르다가 기적과도 같이 자일의 한 쪽 끝이 얼음의 틈새에 끼어들면서 속도가 줄어들자 마자 ....

세 명의 대원은 곧장 절벽 아래로 돌멩이를 내팽개치듯 던져지고 말았다...


제일 아랫쪽이 고상돈, 그 다음에 이일교, 마지막에 박훈규가 차례로 떨어지면서 ....

바위에 끼인 자일을 중심점 삼아 원을 그리면서 단단한 철벽같은 바위절벽에 집어던져졌다.

제알 아랫쪽의 고상돈이 가장 빠르게 던져졌다.

고상돈은 마치 절벽을 향해 집어던진 돌멩이 처럼...  단단한 얼음절벽에 온 몸이 부딪히면서 우모복이 터져버렸다...

온 천지에 거위 깃털이 날렸다 .... 


그 때 까지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절벽에 부딪힌 이후에는 의식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해외 원정대의 그 튼튼한 극한지용 우모복이 터질 정도의 충격을 사람이 어찌 견딜까 ?

도대체 얼마나 세게 부딪쳤길래 우모복이 터졌을까 ?


두번째로 떨어진 이일교는 떨어지다가 자일이 걸려 한 순간에 멈추면서 몸에 엉킨 자일이 단번에 허리를 꺾어버렸다.

이일교가 이 순간 까지 의식이 있었다면,, 조금 전 까지 부러진 다리에서 느껴지던 지옥같은 고통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노련한 산악인인 이일교는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척추가 부러졌구나 ....  하는 것을 ....


의식이 없었다면 모르겠으나 ....

이 충격적인 사고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면 ,, 이일교는 감사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신이시여 ... 이제 제가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피할 방법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고통에 몸서리 치면서 얼어죽는 고통까지 더하지 않고 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


마지막으로 떨어진 박훈규는 의식을 잃고 떨어졌다.

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온 몸이 흐느적거려서 충격을 적게 덮어쓴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다리는 아래로, 머리는 위로 한 상태로 자일에 엉켜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세 사람은 6000미터 고지에서 순식간에 무려 800 미터를 굴러떨어졌고 ....

그 충격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도 모자라서 영하 60도에다 시속 300km의 폭풍이 부는 절벽에 매달린 것이다.

그 곳은 웨스턴 리브 절벽이었다...


이제 ...................

이 세사람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이 가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 누가 기대라도 하겠나 ?

얼마나 평온히 죽느냐 하는 것만이 신이 주는 선물이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7시간이 지나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미국인 관광객이 주축인 등반대가 있었다..

그들의 눈에 ...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사람의 형상을 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저거 사람 아냐 ?

그런 것 같어 ...  이 날씨에 절벽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

이상해..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 ?  ...   바람에 흔들리는 거야..

사람이 맞아.. 가 보자

그래 가자.. 뭔 사고가 난 것 같어..


미국인 관광객이 힘들게 힘들게 현장에 도착하여 목격한 광경은 ....

가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참혹하고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끌어올렸다.

관광객들은 정말 죽을 힘을 다 했다.

세 명의 신체 건장한 청년과 그들에게 매달린 장비의 무게는 거의 300kg 은 되었을 것이다.


우모복이 터져버린 고상돈은 이미 사망한 상태로서 얼음같이 굳어있었다..

아니다.. 얼음덩이가 되어 있었다. 영하 60도에서 7시간이 지났으니 ......

대한남아가 어찌 이런 죽음을 맞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일교도 끌려 올라왔는데 우모복이 멀쩡해서 얼어붙지 않아서인지 ... 산악지식이 부족해서 인지 미국인 등반객들은 생사 구분을 못했지만 아무런 생명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척추가 꺽였는데 어찌 살아있으리 ...


박훈규는 제일 먼저 끌려올라왔는데 ,,,,

체온이 유지되는 듯 몸이 차갑지 않아서 살아있다고 판단하고는 의식을 돌아오게 하려고 흔들자 잠시 뒤에 깨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  박훈규가 깨어난 뒤가 문제였다.


박훈규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깨어났다..  

미국인 관광객을 보자마자 미친 듯 소리 지르며 자일에 엉켜서 운신도 어려운 판에 발버둥을 치고 악을 쓰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미국인 관광객에게 달겨들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깜짝 놀라서 박훈규를 제압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사람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저항을 하면서 오히려 미국인을 걷어차고 물고 할퀴는 등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조리 절벽 아래로 다시 떨어질 것 같아서 미국인들은 박훈규를 다시 단단히 묶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박훈규는 다시 의식을 잃을 때 까지 미친 짐승처럼 소리지르고 발악적인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이미 얼음덩이가 된 고상돈과 ,,

다리가 흔들거리고 허리가 꺾였으며 생명반응이 없는 이일교는 그대로 두고 ,, 


그나마 살아서 바둥거리는 박훈규만 생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는 썰매에 꽁꽁 묶어서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들은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인디언들이 부르는 '위대한 드날리' 는 평소와 같이 아무 변화가 없었다.





2 명의 대원 죽어서 ,, 1 명은 살아서 맥킨리를 내려왔지만 ,,

살아 남은 박훈규는 자기가 관광객에게 구조된 직후에 어떤 행동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북받치는 정신적 고통에 울지도 못 하고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박훈규는 미국인들을 저승사자로 착각했다고 한다.

죽지 않으려고, 죽기 싫어서 죽을 힘을 다 해서 저항하느라고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


고상돈과 이일교가 죽었고 ...... 

두 동료의 죽음이 어떠했다는 말을 듣고는 ........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과 ,,,,  동료는 죽었는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 그런 저항을 했다는 사실을 치욕으로 받아들이고는  너무도 괴로워 하며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침대에 묶어서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했었다...


돌아와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을 당시의 일이다....

동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하고 있었는데 .....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 먼저 간 두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 발악을 하는 바람에 침대에서 떨어져서 되는대로 손에 걸리는대로 차고 부수고 던지는 탓에 멀쩡했던 두 다리를 모두 부러뜨리고 말았다 ... 

 

얼마나 미친 듯한 발악이었는지 짐작이 되실겁니다.

제 정신으로 자기 다리를 부러뜨리는 발악이 가능하겠나 ....


그러면서 끝끝내 힘이 떨어져 입원실 바닥에 드러누워 부들부들 떨면서 짐승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는데 .....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박훈규의 참혹하기 까지 한 그 마음을 짐작한다면 어떻게 말리겠나 ...

박훈규는 진심으로 죽어버리려고 하지만,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으니 ....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말이다....


친구들은 전부 같이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의사도 간호사도 전부 같이 울었다고 한다 ...

박훈규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







박훈규는 지금 ,, 등산객이 적지 않은 어느 경치 좋은 산 아래에 등산용품점을 차려서 살고 있다.

지금도  달 밝고 눈 내리는 밤이면 울면서 술을 퍼마신다고 한다...  밤새도록 울부짖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상으로 인해 다 잘라버리고 몇 개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등산화 끈을 묶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말한다..

아마도 저 친구는 결국 맥킨리에 가서 죽으려고 하나보다....

저다지도 괴롭게 살게 하지 말고 우리가 맥킨리로 보내주는 것이 낫지 않겠나 ?  했단다.


소식에 의하면, 최근에는 정서적 안정을 찾고 많은 헌신적인 일을 한다고 한다.. 참 다행이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대한남아, 고 고상돈 대원과, 고 이일교 대원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고상돈은 31세, 이일교는 2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름다운 꽃 보다 더 가슴 아픈 나이다.


고상돈의 산소는 고향 제주도의 1100고지 어느 곳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미망인과 딸이 있다.


당신들 ,,  대한남아들이여 , 그 기상을 세계에 떨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