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시

슬픔의 기원 / 박범신

낙동대로263 2017. 5. 3. 00:07




내내 여름이었네.


커튼을 열고 창을 열고,수시로 냅다 달려나가 너를 찾아 해맸어.

계단은 두 단씩 건너뛰고 때로는 위험한 비행도 마다하지 않았지.


가끔은 네가 있다는 곳에 도달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매번 너는 그곳에 없더군.

너를 찾아 너무 빨리 달리다가 정작 네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적도 많았다네.


단 한번도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곤 상상하지 못했어.

길은 다른 길로 이어져 끝이 없었거든.




그러는 사이 예전의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지고,

창을 닫고 커튼을 치고, 또 그러는 사이 세상의 모든 길이 흰눈으로 뒤덮여 지워질 때쯤,


어느 깊은 밤이던가. 쑤우와, 쇠주전자 물 끓는 것 같은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놀라워라, 네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네.

좁고 어두운 그 방, 창과 커튼의 안쪽, 그 오랜 내실에.


촛불의 심지가 발라당 누우면서 가파르게 솟구쳤다 스러지는 마지막 불빛에 아, 단한번 너를 본 셈이었지.

네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 형상을 온전히 보기도 전에

촛불이 꺼지고만 그 찰나에,

그리고 이내 깊고 긴 어둠이 왔네.

더 이상 새로운 길이라곤 없는, 영원한, 무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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