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이야기

Story of My Father

낙동대로263 2012. 2. 7. 14:06

 

 

 

아버지는 1920년대 사람이다.  실로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 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라서 비교가 안되는 그런 차이가 있다.

 

아버지가 태어난 이 시대는 일본 점령기였는데,

일본이 점령한 1910년부터 10여년이 지난 시점에 태어났으니 ,,,  

아버지는 태어나 보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우리나라를 인생 전체에 걸쳐서 경험한 사람이다.

 

당연히 인생의 청소년기라는 중요한 시절을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일본식 사회와 교육과 가치관에 물든 사람이다.

그러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기는 했으나 그 뒤로도 길고도 긴 세월을 일본의 각종 제도와 의식구조에 의존해야 했던 우리나라 사정 상, 아버지와 일본은 뗄래야 떼어지지가 않는 인연의 고리가 족쇄처럼 걸리고 말았다.

그게 아버지의 인생 전체에 걸쳐 형성되어, 가족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단초가 되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9 형제로서 참말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금슬이 좋아서 그런지,,, 

그 당시는 원래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모르겠지만 ,,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많은 형제를 두었다. 

나에게도 고모님이 있기는 한데,,,   그건 할아버니의 외도의 결과였단다.

 

할아버지는 공부를 좋아해서 그게 탈이었다고 한다.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할아버지가 책만 보고 농삿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자 증조부께서는 할아버지를 겨우 먹고 살 전답만 조금 떼어주고는 쫓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만 좋아한 할아버지의 향학열은 꺽이지 않아 할머니가 농사짓고 자식 낳고 키우고 ....   말도 못할 고생을 하신 것은 나도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살아나 있었으면 다행인데 ,,,  그렇게 쫓겨난 신세를 한탄하셨는지 ...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할아버지는 ,,,  나중에는 요즘으로 치면, 알콜 중독이 되어 지나가는 까마귀에게도 술을 대접하여 보냈다고 자식들이 이야기 할만큼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사시다가 46세 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40대 초입에 과부가 된 할머니는 ,,,  

그 나이에 손바닥만한 밭떼기와 9 명이나 되는 아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할머니의 인생은.... 꼬일대로 꼬였다고나 할까?

고생바가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인생이 펼쳐졌고 ... 

먹고살기도 난감한 처지인데 자식 교육은 물건너 간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고 한다.

 

그런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

 

할머니가 깨인 분인지 어떤지 몰라도 막내라도 국민학교는 다녀야 한다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형님들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국민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갔단다.

학교에 보내보니 하도 공부를 잘해서, 학교 선생님이 할머니에게 반강제로 진학을 권고했고 ,,

할머니가 다행히도 선생님의 뜻을 따라주어 진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학교 선생님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고 , 그 흔적에 젖어살던 시절이라 학교 선생님의 뜻은 제법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었던 시절이라 그게 가능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일생에 있어서는 커다란 다행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농삿꾼으로 일생을 마쳤거나 전혀 다른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 오늘은 여기까지 ....

 

 

2012. 2. 8 (수) 에 계속 이어나감.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진주의 모 유명 학교에 지원을 하는데 ...   형님들이 바라는 바와는 반대로 합격을 해버린다.

형님들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아버지는 울산의 초갓집을 떠나 진주로 향하게 된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얻어들은 이야기들로 짐작을 하자면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 공부라는 것은 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한 공부였었고, 내용은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방식 그대로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님들 ....  네 큰아버지들의 반응은 참으로 가관이었다고 한다.

특히 맏형님, 제일 첫번째 큰아버지의 반응은 그 뒤에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어린애같은 행동으로 그 질투심을 표출하셨다.

한 마디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성의 상징적인 행동을 보는 듯한 ....   그런 행동을 나도 보았고 , 그렇게 판단했었다.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모님의 교육방식에 의해 나라는 인간이 형성되었고 , 그 중의 하나인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만큼,

아버지의 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식이 아버지의 인성을 논한다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이니 죄송하더라도 해야 할 이야기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청소년기를 보낸 아버지의 인성적 성향은 요즘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이성 만을 앞세우고 감성과 마음과 정신의 풍부하고도 넓은 세계를 차단당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죽기 아니면 살기,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 도 아니면 모 등등 .... 

전쟁을 위해 개발된 교육방식을 그대로 둘러 쓴 아버지였기에 평화로운 공존과 협상과 인간의 감성, 정신세계, 정서세계, 마음의 움직임 ....   등등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방식이었고, 시키면 하지 무슨 이유가 있어 ?  하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당연히 난 그런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고 이해도 되지 않고, 항변도 못하는 입장의 나로서는 왜 이렇게 해야 하며, 어째서 내가 이런 꼴로 살아야 하는지 모를 ....  암담함과 이 집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야 이렇게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설명도 분석도 뭣도 안되는 ...  

그야말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 당하는 일이니...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고 , 아무 것도 되어지지도 않고 , 그 무엇도 이해고 나발이고가 없는 그런 암흑시대였다고나 할까 ?

몰라서 모르고 , 몰라서 당하면서도 그게 뭔지도 어째서 인지도 모르는 ...  그런 상황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내 정서라든지 정신세계라든지를 좀 알고 그에 알맞은 교육방식을 선택하셨거나, 내 관심 분야와 내 재능을 알고 개발해 주셨더라면 , 난 아마도 직업 정도는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  한다.  

그게 나를 더 좋게 만들었을지 나쁘게 만들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  암튼 "달라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뭐 ....    손톱만큼도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부모님 조차도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사회와 세계가 그러했으니 부모님의 여러가지가 그렇게 형성되었고,

부모님은 그들이 아는 만큼만 실천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부모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을 .... 

지금 내가, 이 시점에 와서 원망은 무슨 원망을 한단 말인가 ?  

 

다만, 난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근저를 알고, 그 근저를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서 ,,,,  늦었지만 좀 더 완성된 인간이 되고픈 소망을 이루어 볼까 하는 ...   난감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 중에 설명을 위한 기술이니 ,,,  시작한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나를 설명하자니 나를 둘러싼 환경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에 의한 기술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렇게 아버지는 공부를 했고 졸업을 한 후에 학교 선생님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 이후의 아버지의 행적과 직업 등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고 ,,,  

나도 아버지의 새까맣게 지나간 과거사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물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평생을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와 흔적이 온 몸의 새포에 배여 그걸 씻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할 뿐이고, 내가 태어나 청소년기를 비롯한 내 평생에 걸쳐 아버지와의 관계는 부자지간으로서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내 아버지의 직업세계에서의 위치와 그 위치에 올라가기 까지의 치열한 과정과 부단한 노력은 인정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라든지 정신세계의 풍부함이라든지 정서의 유연함이라든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  선뜻 아버지의 직업세계에서의 그 위치만큼 인정하기가 어렵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나하고는 다른 가치를 따랐을 뿐이니까 ...

 

지금이야 다양한 인간성과 다양한 성향과 다양한 취향을 대체로 인정하고 맞다 틀렸다, 옳다 그르다, 라는 방식이 아닌 "서로 다를 뿐" 이라는 유연함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아버지의 일생을 통털어 그런 유연함을 인정하는 시기가 있었을까 ?   하는 의문이 가득한 지금, 내가 아버지에 대해 이런 식의 평가를 하는 것이 과연 꼭 지적해야 할 그런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건 오직 내 필요에 의한 행동이지만 죄책감은 없다.  난 "다르다" 는 것일 뿐, 좋고 나쁘고를 논하는 것이 아니니까 ...

 

아버지와는 여러가지 사건사고가 있다.

그러나, 그걸 여기서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인 것 같다.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 남아서 쓴 웃음을 짓는 그런 일일뿐이다.

어쩌면 누구에게 떠들어서 그런 쓴 웃음을 지을 근저를 씻어내는 작업이 필요할른지 어떨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To be Continued .............. 오늘은 여기까지 ....

 

2012. 2. 13 (월) 에 계속 이어 나감.

 

아버지는 자기 직업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한 승부욕과 근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뭐든지 하면 된다였다.

그리고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아버지 인생의 가치는 그런 것들에 기준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바라는 목표를 이루면 혼자 좋아서 희희낙낙이었고, 실패하면 화를 참지 못해 난리를 치는 인성의 소유자였다.

그런 아버지의 언행을 난 직접 보았고, 경험했으니까 .....  

 

아버지가 하찮게 여긴 요소는 돈이었다.

지금도 경제적 관심과 개념은 도대체 찾아 볼 수가 없는 사람이고, 뭘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흥미도 없었다.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그게 돈이 되고 안되고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자기 일을 함으로서 얻는 명예와 , 그 일이 가지는 사회적 명분 ,,,  

그런 것들이 주요 관심사 였을 뿐, 식구들이 먹는지 굶는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왜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은 ,,,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성향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 난 그 어려운 시기에도 열심히 해서 다 잘되었는데 너희는 이 좋은 세상과 환경에서 왜 그렇게 못하니 ? "  가 아버지의 의문점이었다.

뭐 ... 그렇게 생각하면 아버지 말도 옳은 말이지만 ,,,  

난 아버지와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아버지는 자기와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내가 이해가 안되는 ... 그런 일이었다.

 

난 무척 심성이 여리고 감정이 예민했으며 예술분야에 아주 관심이 많았는데 ,,,  

아버지는 그런 분야에는 전혀, 완전히 관심이 없었고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상종도 하지 않을 그런 기세였으니까 말 다했지.

남자가 여리다는 것, 예민하다는 것, 감성적이라는 것 ...   이런 것들은 아버지는 아예 이해도 못했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으니 결과는 뻔했다.

난 그러는 아버지의 요구가 늘 힘들고 괴로웠고, 아버지는 늘 답답하게 짝이 없었다.

 

이런 관계는 내가 집에서 독립을 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남동생이 수년 전,  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동생이 뭔가 공부할 것이 있어서 미국에서 수년간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  그 때, 미국에서 쓴 편지였다.

 

요지는 이러하다.... 

 

형님, 난 아버지와 형님 사이의 관계를 , 형님이 잘못하여 일어난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이 사람들의 교육방식과 학교와 부모들의 역할을 보고는 형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 적성을 너무도 잘 살릴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사 알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그 동안 형님에 대해 가졌던 여러가지 편견을 고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   여러 장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였지만, 요지는 이러한 내용이었다.

 

난 이 편지를 받고 난 쓴 웃음만 흘리고 말았고,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제목은 " 신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 라는 단편소설이었다 ...  

 

동생이 귀국했을 때 말했다.   

동생아, 니 편지는 잘 보았다.. 

난 내가 죽기 전에 , 내가 기다린 보람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단다 ...   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아버지를 비난할 뜻도 없고, 아버지를 고칠 생각도 없고, 아버지에게 따질 생각도 없다.

그냥 아버지와 나는 다른 시기를 사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여기서 끝을 낸다.

이만하면 설명은 충분하고, 나도 더 이상의 무엇을 떠들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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