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 말

[스크랩] 영화 <Samsara, 삼사라>

낙동대로263 2018. 6. 29. 22:39



영화 , 2001년 개봉작이다.

독일, 프랑스, 이태리, 인도, 이탈리아 합작이라 한다.

 




Pan Nalin이란 인도사람이 감독,

타쉬역은 숀 쿠(Shawn Ku), 페마역을 한 배우는 鍾麗緹(Christy Chung)이다.

소남역은 Jamayang Jinper가 담당, 수자타역은 독일 출신 여배우 Neelesha BaVora가 담당했다 한다.

감독과 출연 배우들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다만 鍾麗緹는 <백발마녀전 2>, <잔다라> 등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보지 못했다.

 

대사는 티베트어라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전적으로 번역된 자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적 배경은 인도 Ladakh, 해발 3500m 지점에 있는 사원과 마을이다.

 

그 치열한 정진 끝에 이룬 깨달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도입부: 고행에서부터 깨달음, 그리고 깨달은 후 찾아오는 허무와 회의, 거기에 따른 파계

2. 전개부: 환속과 그에 따른 속세의 생활

3. 종결부: 다시 출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구성은 우리 고대소설 <구운몽>과 매우 닮았다.

<삼사라>의 전개부가 현실의 삶인데 비하여 <구운몽>은 꿈이다.

또 <삼사라>에서의 속세의 삶은 <구운몽>처럼 극단적인 영화와 쾌락도,

<조신설화>처럼 극단적인 고통의 삶도 아니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이라는 점이 다르다.

 

1. 도입부

① 주인공 타쉬는 다섯 살에 출가하여 20년 수행하였다. 다시 3년 3달 3주 3일을 고행하여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 절로 돌아온다.

신화적 상징에 의하면 그가 고행한 聖所는 자궁 속이다. 자궁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 초월적 존재가 된다.

  


  


 

 

어린 스님은 관심이 많다. 그도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② 지친 몸으로 말 등에 엎드려 가는 도중 마니 만달(돌에 경전을 새긴 것)에 새겨져 있는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는 구절을 본다.

아직 뒷면은 보지 못한다.

  

 

③ 고행의 결과 수좌에서 고위 승직 켄포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극복해야 될 Libido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깨달음은 완전하지 않다.

 

신년축제 로사르,

라다크에서는 티벳력으로 11월 1일부터 새해이다.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보다 두 달 빨리 새해를 맞는다.

새해가 밝으면 신년 축제 로사르가 9일간 펼쳐진다. 아이들은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액을 사고파는 ‘울루물루’놀이를 한다. 축제 기간 마을 사람들이 뽑은 신의 대리인(라마즈구)은 마을의 모든 집을 돌면서 그 가정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고 모든 재앙, 액을 데리고 간다.

축제 마지막 날, 모든 마을 사람들의 재앙과 액을 거둬들인 라마즈구는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히말라야 빙하가 녹은 개울에 목욕을 하여 액을 씻어내고 신에서 인간으로 돌아온다.

 

타쉬는이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Libido 때문이다.

 



   

 

④ 최고의 승려 첸툴구, 그는 소년이다.

그는 사람들이 고승의 환생이라고 믿는 린포체이다. ‘린포체’는 영적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최고위 라마에게 부여하는 존칭이다.

 

타쉬의 고민을 들어 안 첸툴구는,

“마을 추수축제에 보내 바람을 쐬게 하여라.”한다.

농부 텐진의 집에 가서 공양을 받는다. 이 장면은 마치 싯다르타 태자의 사문유가와 같다.

 

그는 텐진의 딸과 동침한다.

그는 그것이 꿈인 줄 알고있다. 꿈이 아닌 줄 알면서도 꿈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꿈이지만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면서 꿈이다.

  

  

 

⑤ Libido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몽정을 한다. 도반 소남은 눈물을 흘린다.

수도승으로서의 타쉬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한다.

  


 

 

⑥ 여인에 마음을 빼앗겨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타쉬를 위해 스승은 정진중인 고승을 찾아가게 한다.

“이제는 선택해야지.”

 

묵언수행 중인 노승은,

춘화를 보여준다.

옆으로 보니 해골이 된다. 白骨觀이다. 육체의 무상함을 알고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止觀이다.

자장율사도 처음 출가하여 백골관을 닦았다.

 


 

 

마지막 그림은 선정에 든 붓다다.

  

 

노승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족자에는 “이 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라 쓰여있다.

  

 

道는 세상 밖 먼 이상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속세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것도 실은 본질은 아니다. 쾌락도 현상일 뿐이다.


이 영화는 한 수도승의 본능적 정욕을 통해 도를 말한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금기로 삼는 ‘섹스에도 도가 있노라.’

이것은 티베트 불교의 성격과 관계있을 것이다. 나아가 티베트 불교를 바탕으로 금기인 다른 종교의 교리까지에 도전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인류가 이어지는 한 윤회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⑦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 와 스승에게 따지 듯 물었다.

“부처님은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습니다. 저는 5세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처럼 살았습니다.

부처님의 깨우침은 속세의 경험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요.

스님,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께선 깨닫지 못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셨지요. 자신의 관점으로 깨달으라고 하셨어요. 깨우치기 위해서 몰라도 되는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해 알아둘 것도 있습니다.”

  

 

그가 출가 수행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당연히 이런 말할 권리가 있다. 깨달음은 세속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는 말도 당연히 옳다.

 

스승 아포는 타쉬의 마음 속, 행동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스승은 타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말한다.

“타쉬야 그것은(텐진의 딸과 동침) 꿈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는 유연하다.

파계했다고 파문하지도 않는다. 종교가 곧 생활이니까. 우리들은 어쩌면 종교가 위장하기 위한 장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타쉬의 스승 아포는, <구운몽>의 성진의 스승 육관대사와 흡사하다.

 

성진은 스승 육관대사의 심부름으로 절 밖으로 나갔다가 아름다운 아가씨 8명(8선녀)을 본다.

절에 돌아와 승려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성진이 여덟 선녀를 본 후에 정신이 자못 황홀하여 마음에 생각하되, 男兒l 세상에 나 어려서 공맹의 글을 읽고, 자라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 나면 將帥l 되고 들면 정승이 되어 비단 옷을 입고 옥대를 띠고 옥궐에 조회하고 눈에 고운 빛을 보고 귀에 좋은 소리를 듣고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고 공명이 후세에 드리움이 또한 대장부의 일이라. 우리 부처의 법문은 한 바리의 밥과 한 병 물과 두어 권 경문과 일백 여덟 낫 염주뿐이라. 도덕이 비록 높고 아름다우나 적막하기 심하도다.

대사 모든 제자들을 모으고 등촉을 낮같이 켜고 소리하여 꾸짖으되, ‘성진아 네 죄를 아느냐?’

‘사부 우러르기를 부모같이 하니 성진이 12세에 부모를 버리고 스승님을 좇아 머리를 깎으니 연화도량이 곧 성진의 집이니, 나를 어디로 가라 하시나이까.’ ‘네 스스로 가고자 할새 가라 함이니 네 만일 있고자 하면 뉘 능히 가라 하리요? 네 또 이르되 어디로 가리요? 하니, 너의 가고자 하는 곳이 너의 갈 곳이다. ……’ ‘네 죄인을 領去하여 풍도에 가 交付하고 오라.’”

 

이 장면은 성진이 비몽사몽간에 꾼 꿈이다. 육관대사가 성진의 깨달음을 도우기 위해서 꿈을 꾸게 만든 것이다. 성진은 풍도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다.

지금부터 양소유의 한평생이 전개된다.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형이하학적 세계로 온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속세를 떠나 붓다의 길로 가고, 그는 반대로 신성한 곳을 떠나 속세로 간다. 그러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聖이 俗이고, 속이 성이며 번뇌가 깨달음인 것을.

 

2. 전개부

① 절을 떠난다.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다. 승복을 벗고 속인이 된다. 

 


  

 

이 장면은<구운몽>에서 승려 성진이 양소유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다만 양소유로 태어나 사는 한 세상은 꿈이다. 승려 성진은 현실이고 양소유의 삶은 꿈속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이 꿈같고, 꿈이 현실로 착각하게 구성되어 있다.

개 칼라가 그를 페마의 집으로 인도한다. 꿈에 보았던 그 여자, 동침했던 아름다운 페마, 그런 의미에서 운명적이다. 아니 어쩌면 <구운몽>에서처럼 꿈인지도 모른다.

 

떠돌이 파계승 타쉬는 추수가 끝날 때까지 그집에 고용된다.

 

 

사랑은 아름답고 늘 즐거운 것만 아니다. 페마의 정혼자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어쨌든 아름다운 페마와 결혼하여 이곳에 눌러앉았다.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툴구. 카르마[業]의 화신이다.

  

 

태자 싯다르트는 아들 라훌라를 낳고 드디어 궁전을 벗어나 수도자의 길로 나선다.

타쉬도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진짜 출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② 농사를 지어 곡물을 판다. 이제 철저한 생활인이 되었다.

곡물상 다와, 저울을 속이는 못된 장사꾼이다. 이런 사람은 어디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있다. 이 깊은 골짜기까지 곡물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기에 알고도 속아준다. 이게 세상의 삶이다.

③ “제가 도시로 가져가서 직접 팔께요. 다와의 버릇을 고치겠어요.”

 

곡물을 팔러 도시로 간다.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처음으로 도시로 나갔다. 다와에게 팔 때보다 2배는 더 받았다. 

  

 

④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돈이 그만큼 중요한가. 일꾼이 너무 많아 돈이 많이 든다고 투덜거리자 아내는 말한다. “왜 불쌍한 사람들을 자르려고 해요” 아내가 더 부처님에 가깝다.

 

⑤ 밀밭에 불이 났다. 누가 불을 질렀다. 반은 타버렸다. 세속의 삶은 이렇게 고통스럽다.

곡물상 다와를 찾아가 분풀이를 한다. 세속적인 삶이니 그럴 밖에. 깨달은 자가 할 짓은 아니다.

실컷 얻어맞는다.

 


 

 

⑥ 아내와 아들이 곡물을 팔러 나간다. 장차 그가 떠나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복선으로 그가 다시 떠날 것을 암시한다.

 

이때 수자타가 찾아온다. 야성적이고 변태적인 수자타.

수자타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범부도 이러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범부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수자타는 주인공 타쉬의 마지막 여자이다. 이제 진짜 출가할 준비를 다 한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그의 아내 야소다라 말고도 많은 여인이 있었다. 극단의 쾌락 속에 탐닉하기도 했다. 극단의 쾌락을 아는자 만이 극단의 금욕도 가능하다. 근기가 높은이만이 가능하다는 역설도 분명히 성립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못된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6년동안 고행했다. 그러나 몸만 고통스러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틀렸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수행자의 금기를 깨고 네란자라 강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기진하여 거의 허탈상태에 빠져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수자타란 마을 처녀가 나타나 우유죽을 준다.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싯다르타는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른다.

"샤카님. 현악기의 줄을 너무 강하게 감으면 끊어져 버려요.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나지 않지요.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은 악기의 현을 적절히 조정하는데서 얻는 것이랍니다."

깨달음의 바른 길을 일러준 것이다. 어쩌면 싯다르타를 도우기 위해 제석천이 보낸 사자일까.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한다.

“수행자들이여, 두 극단을 버려야 한다. 그 하나는 온갖 욕망을 좇아 쾌락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고행에 빠져 자기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추한 일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짙은 회한일까.

그러나 수자타와의 불륜은 바로 그를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Herman Hesse(1877~1963)의 소설 에서 싯다르타는 온갖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후 무엇을 할 것인가.

밥벌이를 위해 속세로 나온다. 어떤 장사꾼의 서기가 되었다. 봉급을 타면 모두 도시의 창녀에게 갖다주었다. 그리고 그 창녀에게서 아들도 얻었다. 그 아들 이름이 라후라나 카르마는 아니지만 역시 싯다르타의 속을 무척이나 썩힌다.

그도 이제 늙었다. 강변에 자리잡고 뱃사공 노릇을 한다. 이것은 越川功德이다. 그런 탓인가. 거기에 따른 과보인가. 어느날 아침 물흐르는 소리를 듣고 참된 깨달음에 이른다. 물이 흐르는 것(水+去) 그것이 곧 Dharma[法]이다.

 

⑦ 도반 소남이 찾아와 사부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사부의 편지를 전해준다.

사부의 편지에,

“내 임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역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어릴 때 같은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도망쳐 나와 예술가의 광기, 세상의 모든 쾌락에 탐닉하며 제멋대로 살았다. 이에 반해 나르치스는 냉철한 이성과 지성의 소유자로 엄격한 자기 통제 속에 살았다.

헤세는 이 두 삶의 어느쪽도 부정하지 않았다. 얄팍한 종교 윤리의 잣대로 잰다면 골드문트는 당연히 돌팔매를 맞아 마땅한 사람이다.

이 둘은 결국 다른 길로 와서 다시 만난다고 헤세는 자신있게 말한다.

 

3. 종결부

① 잠든 아내와 아들을 두고 떠난다. 싯다르타 태자가 떠나듯이.

 

속세로 나올 때 목욕하고 승복을 버리고 세속인의 옷을 갈아입었던 그 물에 목욕재계하고 삭발한다.

 

  


    

 

② 아내가 지름길로 와서 기다리고 있다.

 

 

아내는  말한다.

“아쇼다라, 이 사람을 아세요. 싯다르타, 왕자 고타마, 석가모니 부처, 다들 그 이름을 알지요. 하지만 아쇼다라는 몰라요. 아쇼다라는 싯다르타와 결혼해서 진정으로 사랑했지요. 어느날 밤 왕자는 그녀와 아들이 잠든 사이에 떠났지요. 득도해서 부처가 되려고요. 떠나면서 그녀에게는 한 마디도 안했어요. 그녀는 병자들을 가엽다고 여겼어요. 싯다르타가 그런 감정과 고통을 알기 훨씬 전부터요. 왕자가 부처가 된 것은 그녀 덕이 아닌가요. 아쇼다라가 남편과 아들을 떠나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요. 한밤중에 자식 버리는 어머니는 없어요. 남자만이 그럴 수 있죠. 오직 남자만이. 싯다르타가 떠난 후 그녀는 분노와 외로움과 슬픔에 빠져 살았다는 건 그 누가 알아주죠. 아무도 그녀에겐 관심조차 없었어요.”

“……”

“아쇼다라는, 아들 라후라가 아빠는 어디 갔냐고 끊임없이 보챘을 때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그 후로 아쇼다라에겐 외길뿐이었어요. 금욕적인 생을 살아야 했어요. 그녀는 삭발하고 수도승처럼 살았죠. 당신의 불도를 향한 열정이 내가 보여준 사랑만큼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날 용서해줘.”

 

 

 

아내는 발우와 염주를 주고 돌아간다.

 

 

  

 

   

 

③ 마니 만달, 전에는 말 등에서 어렴풋이 보았다. 이제는 손으로 만져본다.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뒷면을 본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라고 쓰여있다.

 

  

 

한 방울의 물은 현상, 바다는 본질일 것이다. 한 방울 물은 말라버린다. 현상은 현상일 뿐이지 본질은 될 수가 없다.

깨달음은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서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samsara는 산스크리트어로 윤회, 카르마는 業이라는 뜻이다.  

 


業사상은 도덕적 책무를 오로지 인간의 자율에 맡긴다. 자기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엄격한 도덕률이다. 이미 저질러진 실수에 대하여 뒤늦게 참회하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그 행위의 업보를 받아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인간 행위(업)의 소산이다. 오늘의 운명은 과거의 행위가 만든 결과이다. 이 오늘의 행위는 또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오늘의 행위를 올바르게 영위하기 위하여 먼저 올바른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어있지 않고서는 올바른 행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을 頓悟漸修라 할 수 있다. 붓다가 그랬고, 타쉬도 그렇다.

업사상은 윤회사상과 떨어질 수 없다. 인간의 삶이 今生 한번뿐인 일회성에 머물 수는 없다. 선이든 악이든 행위에 대한 과보는 행위의 주체가 언젠가 새로운 생을 받아야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내가 구원받을 새로운 생이 필요하다. 새로운 생을 위해서는 性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문 싯다르타는 우루벨라 마을 처녀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는 보리수 아래 스바스티까[吉祥, 卍]란 이름의 소년이 베어준 풀을 깔고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앉았다.

“이 자리에서 내 몸의 피가 마르고 뼈와 살이 다 부셔져 없어져도 좋다.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결단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싯다르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몰아내야 했다.

이 세상[欲界]의 지배자 魔羅[波旬]와 최후의 일전을 치르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마라에게 도전장을 보낸다.

마왕-“부처가 된다거나 해탈을 얻고자 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리 이 세상의 지배자나 황제가 되는 것이 낫다.”

싯다르타-“마왕이여, 그대는 한 번의 공양으로 욕계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나는 여러 생을 거치면서 富를, 四肢와 생명까지도 수없이 내던짐으로써 이 땅의 세속적 힘과 영광을 경멸할 수 있었다. 또 그것을 증거했다.”

이어 오른손가락 끝으로 대지를 가리키며,

“이 대지가 나를 위해 증언하리라. 나를 위해.”

그러자 대지는 동서남북 상하로 진동하고 신비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지의 여신이 싯다르타를 향해,

“당신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인간계는 물론 신들의 세계에서도 최고의 권위이십니다.”

마침내 마왕은 물러서고 말았다.

마라와의 싸움은 끝났다. 일단.

마라의 존재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붓다의 생애에도 수없이 나타나는데, 하물며 범부에게서야.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치열한 고행으로 그러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일일까?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답이 아닌 문제만 여전히 남아있다.



출처 : 달마루
글쓴이 : 달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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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길이 이러하거늘 ....

이슬람 놈들이 하는 꼬라지를 좀 보시란 말이다...

그걸 종교라고 믿는 것들이나 , 그것들을 인도주의 어쩌고 하면서 싸고도는 놈들이나 ...

싸고 돌려면 니 돈으로 먹여살리면 되지 않나 ?   왜 우리가 먹여살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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