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이야기

미투(MeToo)운동과 대중의 광기

낙동대로263 2020. 6. 30. 21:02

 

미투(MeToo)운동과 대중의 광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 광풍과 가상화폐 광풍이 불더니 이제는 또 미투 광풍이다. 그야말로 광풍의 시대다. 요즘 사람들은 이 정도의 폭풍이 몰아쳐야지 웬만한 바람에는 미동도 않고 관심도 없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운동, 이른바 미투 운동으로 불리는 이 광풍의 정체는 무엇인가.

'성의 정체성과 성적 차별', '성적 행위의 선택과 결정' 등은 오늘날에야 비로소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로렌스(Davi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제2의 성>과 같은 작품 등을 통해서 오랫동안 꾸준히 다루어졌고,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책과 논문이 쏟아지고 있다.

 

미투운동가들은 이 운동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척결이자 오랫동안 잠복되어있던 사회적 알력의 표출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적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미투운동은 20세기 들어 진행되어 온 '여성해방운동', '여권신장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최근 미국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성피해 폭로 운동, '해시태그 미투(hashtag #MeToo)'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한국의 촛불운동으로 대변되는 대중들의 자각과, 소통의 혁명이라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인터넷 민주주의가 한몫을 한다.

 

미투운동이 전 세계적인 현상은 아니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소수의 국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직 잠잠하고, 같은 동양문화권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문화는 다른 문화가 그렇듯 언제나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존재한다. 미래의 상황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단지 성차별에 너그럽다든가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미개민족으로 간단히 치부해서는 안된다.

 

성행위는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성의 문제에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미 거스릴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이자 사회적 화두가 되어버린 미투 현상에 대해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이 문제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고, 종종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이에 관련된 의견을 교환 한 적이 있다. 그들과의 대화 중 공통적으로 쏟아져 나온 발언들은 대강 이렇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웬 새삼스럽게 난리들이야."

"그저 남자들이란 섹스에 발광한 늑대에 지나지 않아. 스스로 조심해야지."

"잘 됐다. 이참에 남자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확 고쳐놓아야 돼."

"성폭력은 비정상적인 일탈 행위로 비난받아야 하고,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은 남성 우위의 문화에 근거하고 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관습과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성을 상품화하고 여자를 성의 노예쯤으로 여기는 남자들의 추잡한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고 남녀차별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성폭력은 오직 남자들만 저지르는 것인가. 의외로 여자로부터 고통받는 남자들도 많다. 다만 '쪽팔려서' 고발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것들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여기에는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자들의 체념부터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의 적극적인 의지까지 다채로운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말에는 생각 없이 내던지는 무비판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문제를 파헤치려는 날카로운 주체 의식까지 엿보인다. 하지만 이들 견해나 주장은 그리 놀랍고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이 명료하지도 않다. 이것들은 오래전부터 인간학이 다루어 왔으며, 아직도 논쟁이 진행 중에 있는 진부한 주제이다. 이 발언들에 깔려있는 몇 개의 개념과 명제만 분석해보아도 명백하다.

 

성폭력 모두가 일반상해처럼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두 연인 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성행위가 시간이 흘러 폭행으로 변질되는 것은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 때문이다. 종종 '합의에 의한 성관계의 여부'라고 말하지만, '합의'란 명백한 개념이 아니다.

관습과 제도는 중요한 문화요소이다. 이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불합리하다고 해서 쉽게 존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이지만 그 문화에 의해 주조(鑄造)되는 존재이다.

차이와 차별은 다른 개념이다. 남녀의 차이는 동물들이 '암컷'과 '수컷'으로 구별되는 것처럼 자연적인 것으로 인류진화의 동인(動因)이다. (자연적인) 차이가 없는 곳에서는 (인위적인) 차별도 없다. '차별의 철폐'가 '차이의 부정'으로 전도될 수는 없다.

 

내가 위에서 든 예 말고도, 미투운동가로부터 침묵의 동조자와 방관자에 이르기까지 성폭력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이와 유사한 상식적인 진단과 처방이 다른 사회적 현안을 제쳐둘 만큼 중요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적' 미투현상과 미투운동에 대한 일부 대중들의 피상적 이해와 문제 해결을 위한 몰지각한 태도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폭력의 본질보다는 현상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성폭력의 동기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한다. 하루가 다르게 성폭력 사건이 사법당국에 접수되고 처벌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Why)?"라는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 일의 진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How)?"라는 표면적인 사실에 관심을 집중한다.

 

하기야 요즘과 같은 광풍의 분위기 속에서는 미투운동가들의 주류에 거슬리는 반대의견을 내 놓기도 쉽지 않다. 문제의 근원을 분석하고 해결을 시도하는 것 자제가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추어진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미투사태에 대한 의례적인 의견만 오갈 뿐 솔직하고 진정어린 대화를 찾아볼 수 없다. 식견있는 지식인조차 그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이 문제에서 발뺌하거나 '성의 평등', '여성의 자유', '여성의 권리' 등 원론적인 이야기들만 지껄인다.

아무도 양성의 '평등'이 반드시 직업의 선택이나 임금차별처럼 성별 상에 따른 '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지 못한다. 성적 특징에 따른 남녀의 역할분담과 남성과 여성의 성향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남성'이란 단어에서 느끼게 되는 '아버지의 권한과 책임', '여성'이란 단어에서 느끼게 되는 '어머니의 부드러움과 조화'를 말했다가는 그 자체가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얼마 전 "여성에게는 남성을 유혹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한 프랑스의 여성해방론자, 드뇌브(Catherine Deneuve)가 여론의 몰매를 맞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한국의 미투운동은 (나는 우리의 민족성이 그렇다고 믿지는 않지만) 신중하지 않고 조급하다. 내면의 성찰보다는 외적인 행동이 앞선다. 사태에 대한 토론보다는 일단 사건을 벌려놓고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그 해결의 방책 중 하나가 집단행동이다.

 

한국의 미투운동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유별나다. 이미 '광우병 사태'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사회적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각계의 의사를 모으는 방식보다는 집단행동을 통해 의사를 관철하려는 습성이 생겼다. 성폭력의 문제가 불거진지 꽤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현수막과 스피커는 거리를 누빈다.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강경한 투쟁이 성공확률이 높다는 경험법칙이 생긴듯 하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 이 같은 사항으로 대중들이 집요하게 시위를 펼치는 사례를 들은 적이 없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한국적 정치풍토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권력을 지닌 자들에게는 시위의 성격보다는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릿수에 더 신경을 쓴다. 그들에게는 시위대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선거에서의 '표'로 보이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미투문제가 다수의 행동을 통해 당장 해결해야 할 정도로 절대절명의 시급한 것인가? 한국은 가히 시위와 데모의 천국이다.

 

시위와 데모는 문제해결의 근본 대책이 되지 못한다. 목적이 상이한 이익집단들마다 제각기 다른 집단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에 깔려있는 선입견과 편견, 불만의 표출과 대책 없는 선언은 이성적이기 보다 감성적이다. 차분한 성찰보다는 즉흥적이고 방만한 구호만 앞선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이런 태도는 광풍이자 광기이다. 일단 광기에 휩싸이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이며, 해결책에 따르는 역기능과 부작용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취할 겨를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미투사건을 보며 당사자들의 인격 보호보다는 '무절제한 폭로에서 오는 해방감'을 느낀다. 흔히 제3자들이 그렇듯 마치 '엿보기 좋아하는 톰(Peeping Tom)'처럼 사건의 전말을 보며 간접 쾌락을 맛보기도 한다. (자신의 경우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만연된 성적 갈등과 충돌을 잠시 잊고 성폭력범들의 처벌을 보고 대리만족을 취하기도 한다. 일부 강경한 여성들의 의식은 양성의 평등화와 상호존중을 넘어 남성 기피증과 혐오증으로 번지기도 한다.

 

나는 한국의 미투운동이 전례없이 강한 폭풍으로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미투 현상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이 사태의 표층과 심층, 미투운동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과거에 비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크게 달라졌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직은 유럽이나 미국만큼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 약자에 대한 배려가 신장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성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뿌리내렸고, 성폭력 문제를 포함한 양성의 갈등 역시 상당수 해결되었거나 해소될 전망이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내 주위에는 페미니스트로 부르는 여성해방론자, 여권신장론자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애초에 추구했던 목표는 이미 대부분 달성되었다. 각종 국가고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절반 이상이고 초중등학교 교사의 절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가정에서 살림의 경제권이나 아이들의 교육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전투부대 여자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남자 병사들은 무조건 앞으로 돌격해야 하는 세상이다. 남성 위주의 호적제가 폐지되고, 이른바 싱글맘, 골드미스가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여성들만이 출입하는 게이바도 있고, 동성애가 범람하며,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추진될 전망이다.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여자에 의해 억압받는 남자들도 있다. 이런 급속한 사회적 행태의 변화에 대해 걱정하는 지식인들도 많다.

 

먼저, 성폭력에 대해 거부의사와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자, 예를 들어 미성년자나 심신미약자,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들의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며 규정된 형사적 처벌과 배상 제도가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성적 행위의 선택과 결정권을 가진 성인에 대한 것으로, 일방적인 물리적 폭행이 아니라 쌍방 간의 묵시적 동의가 수반되는 성폭력이다. 특히 사밀적(私密的)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객관적 증거를 위주로 하여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최근 논란에 되는 '위력에 의한 간음', '문화권력에 의한 성추행'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소극적인 미투운동과 적극적인 미투운동을 구별하는 것이다. 대다수 미투운동가들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의 실태를 폭로하고 남성만큼 여성의 권익이 보장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일부 급진적인 미투운동가들은 양성의 평등권 이상을 요구한다. 도대체 그들 요구의 칼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위의 관점에 기반하여 작금의 성폭력 사건과 미투운동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첫째, 미투사건의 본질은 돈과 권력에 대한 것이다.

이미 세속의 신(world god)이 되어버린 돈을 비롯하여 정치적, 문화적 권력 등은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다. 누구는 권위를 이용한 인간의 행동이 그것을 지닌 개인의 인격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부당한 힘의 행사는 비도덕적이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힘(power)'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아스럽겠지만 힘의 본성에는 인간의 의지를 압도하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이것은 마치 눈덩이를 굴리는 사람이 어느 때부터 크게 뭉쳐진 눈덩이를 통제 못하고, 눈덩이의 자체 힘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과 같다. 돈과 권력은 마치 뜨거워진 난로가 저절로 바깥으로 열을 방출하듯이 스스로 그 힘을 확인하고 인간 존재를 통해 증명하려고 한다.

 

힘은 그 자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힘이 없던 평범한 자가 힘을 지닌 후에 갑자기 비이성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것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공히 해당하며, 모두가 힘의 하수인들이다. 어느 피해자는 "내가 분개하는 것은 실존적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명예회복이 중요하지 돈과 권력과는 무관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실존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더 심대한 실존적 상처를 입히는 것인가?

이 '실존'이라는 말은 참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실존은 돈, 권력, 명예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래서 남성 가해자 중 일부는 치욕을 참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미투 현상을 보면 가해자 피해자 모두가 돈과 권력의 주변에 있던 자들이다. 돈과 권력이 없는 자는 고소당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실제로 어떤 방도가 가능한가.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공개적으로 표명되면 족한가. 아니다. 돈과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그것으로 보상하지 않으면 명예회복이 불가능하다.

누구나 돈과 권력이 훌륭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제일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행태를 파헤쳐 보면 실상 그 바탕에 돈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깔려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서, 과도한 부와 권력을 분산시켜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미투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이자 계급투쟁이다.

계급투쟁이라고 말하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떠올리며 섬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계층(class) 간의 사회적 지위의 변동을 도모하는 것으로, 인류가 사회공동체를 이룬 이후 사회적 모순이 임계점을 넘어갈 때마다 나타나는 비일비재의 현상이다. 계급투쟁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귀족과 서민', '노동자와 자본가', ' 흑인과 백인', 심지어 '무역전쟁', '난민문제' 등 온갖 형태의 알력과 충돌의 양태로 나타난다. 이런 투쟁의 심층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보다는 돈과 권력, 즉 힘의 쟁취라는 인간본연의 욕구가 깔려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가 말한대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인가? 이점에서 나는 "인간의 역사란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마르크스(Karl Marx)의 말을 실감한다.

 

여성과 남성의 갈등에서 비롯된 우리의 미투운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 계층에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몇 속성이 있다.

남녀의 위계와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것인가? 남성집단과 여성집단을 다른 계급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급진적인 미투운동가들의 의식의 근저에는 남녀의 차이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남성만이 가진 것'은 무엇이며, '남성만이 지배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가진 자', '지배' 라는 것은 사실 모호한 개념이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육체적 능력과 혈통, 지식, 품성, 가문의 전통과 같은 선천적인 힘을 뜻하기도 하고, 속된 말로 '금수저'로 통칭되는 세습적 부유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동물의 세계에서 보이듯 자연적인 측면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적 조건들에서 기인되는 후천적인 것이라 간주한다면,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지 '대립의 일치'나 '타협과 조정'을 모색하기 힘들다.

 

계급투쟁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해소되지 않으면 종국적 형태는 비합리성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테러와 전쟁의 양상으로 변한다. 전쟁을 국가나 민족 간의 투쟁으로 생각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에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치판에서 기타 모든 인간들의 집단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에는 이기고 지는 자가 있을 뿐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없다. 전쟁의 최종 목표는 '승리'이다. 이 점은 노동운동가들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가 올 그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말자"라는 구호에서 잘 느껴진다.

인간은 참으로 미묘한 존재이다. 말로는 "평등과 공존을 이루자."하면서도 그 '같아짐'에 만족을 하지 않고, 힘의 우위라는 차별을 확인하려 한다. 미투운동가들이 기다리는 그날과 최후의 승리도 이와 같은 것일까?

 

셋째, 미투운동은 가치의 전복을 기도한다.

미투운동의 근저에는 남녀 공히 모든 인간이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자는 '인간해방'의 열망이 있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종착이 그렇듯 모두가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을 향유할 수는 없다. 인간 세상의 재화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분배의 정의와 복지의 정도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한다.

어떠한 사회운동이라도 순수한 동기가 변질되면 온갖 부작용이 생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있는 미투운동이 촉발하고 가속시키는 가치 개념의 변화이다.

인간의 가치 중 많은 부분이 성(性)'에 대한 것이다. 인문학에서 이와 관련된 가치적, 평가적 용어들을 빼면 그야말로 빈 껍대기다. 시, 소설뿐만 아니라 허다한 예술 작품들도 명백히 또는 암암리에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성애와 사랑', '이성과 욕망', '자유와 평등', '양성의 차이와 차별', '남녀의 권한과 책임', '결혼과 가정의 본성과 역할'... 이것들은 인간이라는 심연(深淵)의 바닥에 깔려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이자 인간 문화를 이끌어 왔던 중요한 요인들이다.

한국의 미투운동에는 여성관, 남성관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넘어, 인간성의 본질을 이루는 이런 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고 해체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다.

이번 미투사건의 재판 과정에는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더러운 욕망 때문에 생겨난..."이라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있었다. 무지몽매한 가식적인 발언들이다.

 

'사랑 그 자체'는 본래 자유롭고 순수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표현'은 자유롭지 않고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성적 욕망 그 자체는 결코 더럽지 않다. 다만 욕망의 표출이 추하고 죄가 될 뿐이다. 이것들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지면 그 역할도 평등해지는가? 돈벌이, 육아 가사 등을 분담함으로써 남녀가 완전히 균등해지는가?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면 그 책임도 그만큼 늘어나는가? 여성운동이 가정의 보호가 아니라 가정의 해체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차별을 철폐한답시고 남자가 출산을 대신하고 여자가 서서 오줌을 눌 수 없지 않은가! (놀랍게도 이래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충동에 휩쓸리기 쉬운 미약한 피조물이다. 나는 욕망의 구조를 분석하며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투운동의 와중에도 남녀 공히 벌거벗은 걸그룹의 공연을 즐기며, 우락부락한 남자의 근육에 찬탄한다.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음란물과 과다노출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도색성 짙은 공연과 광고에 대한 규제가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미투현상은 성과 관련된 문화적 개념 전반을 반성하게 만든다. 미투운동은 인간성의 이해를 위한 인문학적 탐구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만든다.

 

나는 미투운동의 마지막 귀결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 뜨거운 바램이 미친 광풍이나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지 않고, 향후 신인류가 쟁취해야 할 새로운 인간상의 정립을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by 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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