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이야기

디지탈 시대의 어두움.

낙동대로263 2020. 3. 29. 00:00



한 20여년 쯤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이 된다.

그때 우리나라의 한 세계적인 전자회사가 다음과 같은 광고를 TV에 내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 회사가 개발한 디지털 전자기기들이 일반인들에게 대중화되는 십년쯤 후에는 지금보다 100배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광고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좀 흐른 이 시대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다.

스마트폰의 전원이 켜지는 순간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실시간 화상 통화와 카톡 등으로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대화를 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인공 지능을 가진 무인 자동차도 개발되어서 자동차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이들도 자동차를 이용하여 원하는 곳으로 다닐 수 있는 시대가 곧 열릴 전망이다.

전자기기들로 인하여 과거보다 더 편리해진 세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디지털 문화가 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언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 이들의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엔가 한 대학교수가 쓴 책의 제목이 이 시대의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자주 사용되곤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년들이 아프다는 것이다.

인생이 걸린 대학 입시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아픈 사춘기가 더 아프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좁은 취업의 문을 두드리느라 아프고, 그런 것들 준비하느라고 때를 놓쳐서 뒤늦게 짝을 찾느라 또 아파야 된다.

꿈과 희망이 넘쳐야 할 청년들이 아플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디지털 문화의 대중화로 편리하다는 이 시대의 전반에 걸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청년들만 아픈 것은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팍팍하다’는 소리를 푸념처럼 자주 듣는다.

알고 하는지 따라서 하는지 아주 나이어린 아이들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디지털 문화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줌과 동시에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함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과거 시대의 사람들은 정보의 전달이 아주 늦었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 동네의 소식조차도 간간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입 소문을 통해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군이 쳐들어와도 비오고 안개가 심하게 낀 날에는 봉화단에서 피운 연기 신호를 다음 봉화단에서 확인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알려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비가 많이 와서 하천을 건널 수 없을 때는 많이 지체되어서 뒤따라온 적들과 거의 동시에 성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과거 시대의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대해서는 늦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도 실시간으로 듣고 보는 이 시대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무척 불편하고 갑갑하고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그들이 남긴 시와 노래와 글들을 들여다보면 그 어디에도 갑갑하고 힘들었다는 내색조차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고 정보에 어두웠지만 그 때의 청년들은 아픈 기색을 내지 않았다.

중년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 가난조차도 풍자와 해학과 노래로 표현할 수 있는 여유와 멋이 있었다.

비록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의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지만 그 대신에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들을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안목이 열려 있었던 것 같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색할 수 있는 시간적, 정서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작은 것에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쌀독에 보리쌀만 약간 채워져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듯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욕심이 없는 순순한 감성이 있었다.

아마 그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아프다고 하고, 팍팍하다고 하는 문제들을 보았다면 그것이 왜 아프며 팍팍한 것이냐고 정색하고 반문했을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 말 것은 아파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엄살을 부린다는 뜻은 아니다.

삶이 팍팍하다는 사람들의 신음이 과장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편리하게 보이고 지구 반대편의 세상도 마치 내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 시대의 편리한 문화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팍팍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 인간의 머리와 마음과 정서가 다 소화해 내기에는 벅찰 정도로 너무 많은 정보들이 이성과 정서를 흐리게 하고 병들게 하므로 인하여 생겨나는 시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두 개 이상의 작은 볼을 공중에 번갈아가며 던져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받아내는 ‘저글링’이라는 놀이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저글링의 수는 밀감 두 개 정도이며, 그 정도는 옆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할 수도 있다.

이런 나에게 밀감 세 개를 주면서 저글링을 하라고 한다면 마음과 몸을 완전히 거기에 집중하여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실력에 세 개의 밀감을 번갈아가면 공중에 띄운다면 다른 쪽으로는 전혀 돌아볼 겨를이 없어 내 옷 매무새가 어찌 되었는지, 내 자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살필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정보가 발달되지 않은 시대를 살았기에 그들의 오지랖은 넓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모저모로 충분히 살필 수 있는 시간적 정서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보고 듣는 것보다도 더 많은 엄청난 정보와 소식들을 하루 만에도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많은 정보들과 사건들을 차분하게 다 소화를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몸에 해를 주듯이 단지 우리의 눈과 귀를 스치고 지나간 소화되지 않은 정보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마음과 정서에 어떤 자국들을 분명히 남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었던 한 가지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접한 정보들을 다 소화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지라도 그것들과 부딪친 우리의 마음과 정서는 충격을 받고 있었으며 또 일일이 분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소화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공을 동시에 공중에 띄워서 받아내느라 정신없이 집중해야 하는 ‘저글링’ 맨처럼 그 많은 정보들을 받아내느라 다른 쪽으로는 거의 전원이 꺼진 상태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에 대한 가장 소중한 결정과 삶의 목적마저도 영혼 깊은 곳에서 고뇌하여 답을 찾지 못하고 홍수처럼 떠밀려오는 정보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합류하여 떠내려가고 있는 형국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많은 공들을 공중에 띄워 올린 ‘저글링’ 맨처럼 자신들의 자세가 어떠한지에 대하여도 살필 수 있는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나 저명한 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어이없는 처신을 하다가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던 성공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일들도 이 시대의 지나친 분주함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빠르고 편리한 정보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편리함과 행복을 느끼기보다 아프고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에게 필요한 것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정보들에 치이고 휩쓸림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정서적으로 혼돈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욕심 없는 순수한 감성이 기능을 멈추고, 그 대신에 과도한 정보들과 시대적인 대세의 흐름에 쫓기면서 그 흐름에 뒤쳐진 자신들을 발견함으로 느껴지는 자괴감이 아픔과 팍팍함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우리의 자아와 정서가 본래의 나를 재발견할 수 있다면 젊으니까 아프거나 팍팍할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