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이야기

야생에서 죽은 사람들

낙동대로263 2018. 2. 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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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인이다 ...  라고 ?? 

웃기지 말라구 ...


언론이 멋대로 만들어 낸 허상을 보고 자연 속에서 살겠다고 ?  웃기지 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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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에서 죽은 사람들 1편

http://kr.blog.yahoo.com/fastidio4/1248369.html?p=1&pm=l&tc=697&tt=1203944788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christopher johnson mccandless) 1968-1992.
1992년 당시 ABC 뉴스에 보도된 사진이다.

이 당시 맥캔들리스는 알래스카 오지(아닌 오지)에서 참혹하게 굶어 죽은 사체로 발견됐다.


사실 알라스카에서 조난을 당해 사람이 죽는 일은 흔하다.

근데, 이 친구의 사례는 좀 특이... 하다기보다 황당한데가 있어 미국 전역을 충격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크리스토퍼는(이후 크리스로 약칭) 명문대 출신의 전도유망한 문학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나사 연구원 출신의 사업가로 집안의 재력도 상당했고, 가족 관계도 무척 화목한 편이었다고. 겉보기엔 말이지.


크리스는 전형적인 천재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 예술 사회활동 뭐 자기가 하고 싶으면 다 잘하는 애들 있잖수. 게다가 사회성도 좋아서 어디서나 인기 독차지. (한마디로 일진)
공부도 자기가 하고 싶은 과목만 골라 공부하는데도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했으며, 틈틈이 과외 활동으로 돈까지 벌었다.

특히 돈 버는데 수완이 좋아서 에모리 대학을 우등상 받으며 졸업할때까지 자기가 번 돈으로 차를 사고 은행에 2천만원 훨씬 넘게 저축까지 했다.


한 마디로 가문의 샛별이라고나 할까. 이 다음에 뭘 해도 대성할 듯 했던 크리스는,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갑자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대학에 다니던 중 부모와 대화를 단절하고 학교 친구들과도 교류를 끊은 크리스는, 뭔지 모를 것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빠져 들었다.


그는 톨스토이와 헨리 소로우의 책을 탐닉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알래스카에 갈거라고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그는 '행동하는 천재'답게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1990년 대학 졸업식 당일날, 졸업복만 벗은채 차를 몰고, 은행 돈 2천만원을 기부하고, 그냥 홀로, 인사도 없이, 별다른 준비도 없이, 그냥 마냥 그날 이후 속세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졸업식에 참석한 가족들은 이놈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 당연히 기가 막혔지.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미국이 좀 넓냐.

맘 잡고 '속세를 떠났으니' 경찰도 속수무책. 크리스의 부모는 거액을 들여 전국 최고의 사립 탐정까지 고용해 아들 수소문에 나섰다.


그 와중에 크리스는 알래스카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자기의 차를 숲 한 가운데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재산을 몽땅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곤 이름도 바꿨다. 알렉산더 슈퍼트램프.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새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했다.


알라스카에 가기까지 크리스는 깡촌의 농장에서 남들 죽어도 안하려고 하는 더러운 일도 하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도 굽고, 노숙도 하고, 농사도 짓고, 빌어먹고... 그렇게 세상 밑바닥에서 뒹굴며 살다가 결국 알라스카로 향했다.


이 기간 동안 크리스는 어지간히 열심히 살았던 모양.

단 한번이라도 그와 이야기를 하거나 일을 같이 해본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를 기억했으며,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그중 어떤 노인을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려고도 했다고.


모두 그가 알래스카에 가는 것을 만류했으나, 그가 결국엔 어디에 가더라도 무사히 살아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그만큼 똘똘하고 믿음직한 젊은이였으니까.
하지만, 이 젊은이는 그 믿음을 어이없이 저버렸다.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 일을 하던 크리스는 1992년 4월 15일 알래스카를 향해 떠났다.

히치하이킹으로 알래스카의 오지로 떠난 크리스의 수중엔 쌀 한 자루, 엽총 한 자루, 톨스토이와 소로우의 책 한 다발, 그리고 간식 몇가지 밖에 없었다.


그는 알래스카의 스탬피드 트레일이라는 길을 따라 걷다가 버려진 버스를 발견한다.

스탬피드 트레일은 분명 문명의 흔적이었다.

1930년대 발견된 광산으로 왕래하기 위해 '닦여진' 길이었으나, 60년대 광산은 폐쇄되고 그 뒤로 거의 아무도 지나지 않는 길이 돼 버렸다. 버스는 70년대까지 근처 페어뱅크 시티에서 운행하던 공공 교통수단으로,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시 당국이 버스를 이 버려진 길 한가운데 유기해 버렸다.


크리스는 이 버스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까지, 죽음의 야생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때는 4월 말이었으니 추위는 큰 문제가 되질 않았고, 생존의 가장 큰 관건은 먹을 것을 제때 구하는 것이었다.
크리스는 사냥과 채집으로 식량을 조달했다. 오

리, 개구리, 생선, 토끼, 다람쥐 등등, 먹을 건 많았으나 그걸 잡아 먹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렵에 대해선 책으로도 배운적이 없는 이제 대학 갓 졸업한 아이로썬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갔고, 체력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냥에 지친 크리스는 한번은 훨씬 잡기 쉬운 '먹이'인 순록을 쏘았다가 고기를 발라내는데 지옥 같은 경험만 겪었다고 했다.


 거주하던 버스를 배경으로 크리스의 셀프 샷. 그가 살아있는 동안 찍은 마지막 사진.


정착한지 2개월 반쯤 지나 크리스는 한계에 봉착했다.

야생에서의 생활은 이쯤하고 GG치려 했는데, 불행히도 이 게임은 그렇게 끝낼 수 없었다.


야생 생활을 '청산'하려고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 간 크리스는 자신이 이곳에 완전히 고립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이 되자 산 위에 얼었던 눈이 한꺼번에 녹으면서 2달 전 건너왔던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 버렸던 것.

강을 건너는 것 외에는 그 지역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강물과 산으로 둘러쌓인 지형에 갇힌 크리스. 이제 누군가 우연히 지나가다 구조해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필사적이었다. 때는 7월말이었으나 다가올 겨울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알래스카의 8월이면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하고 가을이 되면 얼어죽을 판이었다. 


게다가 한여름이 되자 얼었던 동토가 녹아버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밭에서 사냥을 하자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때쯤 크리스는 일기를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의 일기 막바지엔 이런 글귀가 있었다: "극도로 약해짐... 씨앗. 서 있기조차 어려움... 위기 상황."
전문가들은 크리스가 독이 든 씨앗을 먹은 것으로 추론했다.

배고픔에 야생에 열린 아무 씨를 마구 따 먹다가 독에 걸렸다는 것.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 이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버스 안에서 배고픔과 고통, 눈에 아른 거리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크리스는 그래도 마지막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갔다. 그 사이 버스에 누가 찾아올까봐 이런 메모를 남겼다.


"SOS.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상을 입었고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몸이 약해져 멀리 걸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건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하느님 제발, 가지 마시고 여기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있어 주세요. 전 지금 먹을 딸기를 구하러 나가 있습니다 저녁쯤 돌아올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크리스 맥캔들리스."


그러나 이런 희망도 8월이 되자 사라졌다.

그는 일기에 자신이 야생에 온지 100일이 됐다는 사실을 자축하면서, 이제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세상을 향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난 그동안 행복하게 살았고, 신께 감사드린다. 모두들 안녕, 모두에게 신의 가호를!"


그는 8월 19일 사망했다. 사인은 굶주림.


그 뒤로 불과 19일 뒤, 침낭에 쌓인 채 처참하게 말라죽은 크리스의 시신이 근처를 지나던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발견됐다.
그 뒤로 4년 후 1996년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크리스의 행적을 추적한 책 "Into the Wild"를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5년 뒤 2007년 존 크라카우어의 책을 바탕으로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 진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알고 난 알래스카 주민들은 격분했다. 크리스가 지도를 들고 가지 않았다는 것. 이 지역의 지도를 보면, 그가 굶어 죽은 버스로부터 불과 500미터 떨어진 곳에 강을 건너는 도르레가 있었고, 다른 방향으로 가까운 곳에 여행자들을 위한 산장도 있었다. 그가, 자신의 얼토당토 않은 자만심 버리고, 지도만 갖고 갔어도 이런 처참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알래스카 주민들은 이것 말고도 크리스가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다고 말한다. 이 젊은이가 자연을 우습게 여긴 오만함을 버렸더라면, 이처럼 자신과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진 않았을 것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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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에서 죽은 사람들 2편

http://kr.blog.yahoo.com/fastidio4/1248372.html?p=1&pm=l&tc=697&tt=1204005284

 

인류의 석유 문명이 발달한 뒤로 알래스카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다. 물론 죽음이야 다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개중엔 도저히 죽지 말아야 될 상황에서도 죽은 경우가 있었던 것이 문제다. 


이번에 소개할 사람 역시 그 수많은 알래스카의 어이없는 죽음 중 하나로, 이 사람이야 말로 자연을 우습게 본 대가를 톡톡히 (죽음으로) 치른 대표적인 사례. (가장 어리석은 죽음만 뽑아준다는 다윈 시상식에 소개될만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칼 맥쿤(Carl McCunn).
1946년생. 텍사스 주 태생. 70년대 알래스카 석유 붐을 따라 페어뱅크 시에 정착했다.

직업은 석유 파이프 건설자, 취미로 사진 찍기를 즐겼다고.


칼의 알래스카 자연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넘쳐 흘러 결국 어느날, 알래스카의 자연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곳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한가득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칼은 1981년 5월 초 비행기 조종사를 돈을 주고 구해 알래스카의 깊은 오지로 떠난다. 그는 여름철 내내 알래스카의 품 안에 살기 위해 수많은 준비물을 가득 싣고 갔다.
대형 텐트, 사진 필름 500통, 20구경, 33구경 라이플, 샷건, 엄청난 양의 식량과 옷가지 등등.


그가 도착한 곳은 콜린 리버라고 불리는 강 어귀의 어느 호수였는데...

뭐 아무튼 지도에 이름도 없는 굉장히 동떨어진 오지였단다.


그런데 이 당시 35살의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비행기 일방 통행 티켓만 끊었단다.

비행기 조종사에게 "3달 뒤에 나 좀 데리러 오쇼"라고 말을 안 했던 거다.
칼은 분명 그곳에 집 짓고 농사 지어서 정착할 생각은 아니었다.

사진 좀 지겹게 찍다가 추워지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다니?


그의 살아 생전 친구들은 그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후에 증언했다.

칼은 기본적으로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동경도 존경도 문학적 감상도 없었다. 그는 그냥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야생으로 출사? 그거 폼나는데? 그래서 알래스카 한복판에 갔던 거다.


친구들은 그가 무척 친절하고 착하고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인기도 많았고 파티도 많이 했고 친구도 많았다.

단지 좀 흠이라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는 거.


그게 좀 치명적이었다.


칼이 집에 돌아갈 걱정을 하게 된 건 8월 말이었다.

알래스카에서 8월 말이면 얼어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쯤이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곳엔 아무도 오질 않는다... 여기서 나갈 방도를 미리 알아보지 않은 건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해가 짧아지고 기온은 무섭게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제 출사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하는게 문제였다.

그는 일기에 또 이렇게 적었다.
"여기 오자마자 총탄을 죄다 호수에 내다 버린 게 자꾸 생각난다. 그땐 총탄이 너무 많아 웃겨서 버렸는데, 이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총탄이 필요해졌다..."


9월의 어느날 아침, 그는 오리를 사냥하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할렐루야 하느님 맙소사 머리 위로 경비행기가 지나갔다.

칼은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한번 지나쳤던 비행기는 다시 돌아와 칼을 향해 저공 비행을 했다. (당시 비행기는 수상 착륙기가 아니라 호수 위에 착륙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두번째 지나갈 때 칼은 더 이상 손을 흔들지 않고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허리를 굽혀 짐을 챙겼다고.


칼은 비행기가 분명히 자기를 봤다고 판단, 텐트에서 짐을 챙겨 놓고 오매불망 구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조대는 일주일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자신의 사냥 허가증 뒤에 적힌 '구조 요청법'을 볼 수 있었다.

야생에서 조난 당했을 때 구조 요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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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비행기를 봤을 때, 두손을 번쩍 들어 흔들면 "구조 요청,"
한 손만 흔들면 "난 괜찮으니 그냥 가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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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비행기가 지나갈 때 오른손만 어깨 높이로 들어 흔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다른 손에 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비행기는 '분명 저 사람 혼자인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라는 생각에 선회 비행을 했던 거다.

근데 이 양반이 구조 요청은 커녕 짐이나 챙기고 있으니 비행기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군'하고 그냥 집에 간거다.
이게 칼에게 제공됐던 마지막 생존의 기회였다.


9월 말이 되자 호수는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가져온 식량은 죄다 동이 났으며, 총알도 거의 다 떨어져, 먹고 살 길이 매우 막막했다. 그는 이제 풀줄기를 묶어 토끼 덫을 놓고, 병으로 죽은 순록 고기를 떼 먹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월이 되자 그의 몸엔 더 이상 연소할 수 있는 지방이 남아있질 않았고, 미치도록 춥고 긴 밤엔 미치도록 추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을에선 지금쯤 자기가 돌아오지 않아 난리가 났을 테고, 나를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을 급파했을 것'이라는 게 칼의 계산이었다.


그는 정말로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뿅하고 나타나 자기를 집으로 데려가 줄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만화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정말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중 하나가 될 지경이 되서야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점점 심하게 걱정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당히 겁나는 상황이다."


바야흐로 때는 11월, 연일 영하 20도까지 우습게 내려가는 상황이었다. 칼의 손가락, 발가락, 코... 그의 몸에 삐죽한 부위는 모두 극심한 동상에 걸려 사정없이 뭉개지고 있었다. 그가 일기에 쓴대로 "이건 너무나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이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자 그는 캠프를 떠나 남쪽으로 걸어 나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미 몸에 극심한 장애가 온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이었다.


후일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칼이 있었던 장소는 알라스카 오지 중에서도 아주 쌩오지로, 짐승의 감각을 가진 최강의 터프 가이도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단다. 하물며 문명 세계에서 파티나 즐기다 온 아저씨가 별 수 있을리가...


칼의 일기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썼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하느님 아버지 저의 연약함과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의 가족을 굽어 살피소서."
그는 30구경 엽총 구멍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때는 11월 말이었다.
그의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시체는 그 다음 해 2월, 알래스카 주 방위군에 의해 발견됐다. 

 

토끼털 백마리로 만든 인디언 담요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123.html

 

 ▲▶ 남극에서의 아문센

 ▲▶ 에스 키모 옷

 


▲▶ 북미 인디언 지역에 많은 눈토끼

 



▶ 토끼털 담요의 제작 과정 그림


1947년에 출판된 캐쉬 레이크라는 제목의 책을 보면 인디언 여인들의 바느질 솜씨의 정수를 볼 수가 있다.

책은 존 로랜즈라는 사람이 캐나다 북부 호수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주변의 인디언들과 살았던 수 년간의 경험을 쓴 것이다.

책에 그가 야외에서 애용했던 토끼털 담요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담요도 이 토끼로  거의 만들었다

토끼는 북미 북부 숲속에 가장 흔한 야생 동물들의 하나이다.

숲과 호수에서 먹을 것을 얻는 인디언들에게 지천에 널린 토끼는 주요 식량일 수밖에 없다.


인디언 여인들은 남은 토끼 가죽을 잘 말려서 그대로 모은다.

가죽이 어느 정도 모이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담요를 만들기 시작한다.

토끼털 담요를 만드는 공정은 시간과 인내와 솜씨가 필요하다.


먼저 잘 마른 토끼 가죽을 가위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길이가 나오도록 마치 사과 깎듯이 가는 띠로 잘라낸다.

길게 나오면 나올수록 좋다. 다음 단계는 더 굵고 튼튼한 가죽 띠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가죽은 아마 카리부나 무스의 가죽일 것 같다. 가죽 띠에는 털이 없다.

굵은 띠에 더 가는 토끼털 가죽 띠를 감아간다.


그러면 이 굵은 가죽 띠는 토끼털로 감겨진 굵은 털 밧줄같이 보이게 변화한다.

이 털 밧줄을 가지고 작은 보자기만한 사각형의 토끼털 천(?) 조각을 짜는 것이다.

사각형의 작은 방석 같은 토끼털 조각이 수십 개가 만들어지면 이것들을 인디언 여인들은 기막힌 솜씨로 굵은 끈으로  서로 연결해서 커다란 털 담요로 만든다.


털 담요의 거친 가장자리는 천을 대서 보기 좋게 마무리한다.

이 담요를 만드는데 토끼털이 백장이 소요된다.

산토끼를 백 마리나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지만 캐나다의 깊은 숲속에서 사냥으로 살아가는 인디언들에게는 별로 큰 일이 되지 않는다. 


책의 작가 로랜즈씨는 엄청나게 추운 겨울에도 야영을 할 때 슬리핑 백 대신 토끼털 담요를 고집하였다.

토끼털 담요로 전신을 감고 자면 슬리핑 백 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잘 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토끼털 담요가 털이 자주 빠져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로날드 씨는 천으로 전체를 싸는 홑청을 만들어 털 담요에 입히는 묘안으로 이를 극복했다.


 

야생에서 죽은 사람들 3편

진 로젤리니(Gene Rosellini)


진은 부잣집 장남이었다. 아버지가 시애틀에서 식당 체인을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삼촌은 1960년대 엄청 유명했던 워싱턴 주 주지사였다. 한 마디로 알짜 부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도련님..


 (사진 좌) 진 로젤리니의 아버지, 빅터 로젤리니. 미국 요식업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진 우) 진 로젤리니의 삼촌, 알버트 로젤리니. 꽤 유명한 정치인, 공무원이었다. 
  정작 Gene 로젤리니의 본인사진은 찾을 수가 없다고함. 

 

1편의 크리스는 전형적인 천재였지만, 3편의 Gene은 천재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뛰어난 천재였다.
일단 그는 강철같은 운동신경과 체력을 자랑하는 철인이었다. 학창 시절 각종 운동 경기 주전을 맡았으며, 요가와 격투기에도 심취했다. 특히 격투기에선 거의 달인의 경지였다고.


물론 학교 공부도 완벽했다. 천재니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단 한번도 안 빼먹고 4.0 만점을 받았으며, 대학 시절(워싱턴 대 - 시애틀 대) 때는 문화 인류학, 역사, 철학, 언어학 등에 빠져 들면서 점차 속세와 멀어졌다.


무슨 말이냐면, 잘 먹고 자고 싸는 것보다 진리 탐구가 좋다는 학문 제일주의에 당착했단 거다.

일반적으로 학문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따고 자신이 배운 진리를 세상에 알리는 길을 걷기 마련인데, 이 양반은 워낙 학문의 도가 깊어서 "그딴 거 다 필요없고" 자기 혼자 배운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자기 아니면 아무도 배우지 못할 것을 배우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해 본적이 없는 것. 앞으로도 아마 시도해 보지 못할 것.


바로 이거였다: 현세 인류가, 자연 속에 맨 몸으로 들어가, 문명의 이기를 단 하나도 쓰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현세 인류는 자연 속에서 맨 주먹으로 생존하던 �만년 전의 조상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진화해 온 탓에 물리적으로 자연에서 그대로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 


Gene은 인류가 옷, 바퀴, 철, 엔진, 화약, 종이 등의 문명의 이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인간 종으로부터 너무나 많이 퇴화됐다고 여겼다.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게, 고양이도 산에 풀어 놓으면 쥐 잡아 먹으며 살아 남곤 하는데, 인간은 그게 불가능해져 버렸으니...
아무도 성공은커녕 시도조차 해본적이 없는 이 연구 실험 주제에 그는 스스로 실험체가 되기로 작정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Gene은 처음부터 무모하게 �만년 전의 석기 시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는 계획을 시기별로 나누어,
로마 시대
철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궁극적으로 석기 시대로, 차츰 거꾸로 진화하기로 했다. 


Gene은 1977년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정착해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몇년 뒤 석기 시대에 도달한 그는 무시무시한 집념과 강철같은 의지로 석기 시대 생활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는 사냥 수렵을 위한 총/칼은 커녕 옷도 가져 가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자연 상태 그대로, 석기 시대 당시 그대로, 처절한 無의 상태에서 생존을 시작했다.
그는 창을 직접 만들어 동물을 사냥하고 덫도 스스로 고안해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나무뿌리, 열매, 해초 등을 닥치는 대로 먹었으며, 누더기와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알래스카의 칼날같은 겨울을 버텼다.


바람과 눈 비 등을 막을 집도 직접 만들었는데, 이때 톱과 망치, 못도 쓰지 않았다. (아예 가져 오질 않은 거지.) 그는 몇날 며칠 몇주 몇달을 날카로운 돌로 통나무를 다듬어 목재를 만들고 그걸 이어 붙여 집을 지었다.


알래스카의 쌩오지에서 이렇게 홀로 생존하기조차 구역질하게 고통스러웠을텐데, 진은 그 와중에 틈틈이 무시무시한 체력 단련까지 했다.


마치 체력 훈련에 미친 사람처럼, 그는 매일 달리기, 암벽 등반, 통나무 들어 올리기 등을 하고, 달리는 중엔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짊어지고 달렸고, 걸어다닐 때는 웬만한 어른 체중에 맞먹는 통나무를 어깨에 이고 다녔다.


그의 일지에 따르면 그는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평균 18마일, 그러니까 거의 30km구만, 30km를 걷거나 뛰어 다녔다. (사실 육식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려면 이 정도 영역이 확보되어야 한다.)


보통사람이 하루만 해도 거품 물고 죽어 버릴 이 '짓'을 Gene은 한두달 하고 그친게 아니라, 자그마치 10년도 넘게 계속했다.
그가 정착한 쌩오지는 매스컴의 보도로 유명해져 북미 각지의 히피들이 몰려와 정착했고, 히피들의 소굴이 된 이 지역엔 "Hippie Cove"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그리고 진은 이 지역의 "시장(Mayor of Hippie Cove)" 으로 불렸다.

물론 시장 노릇은 일체 하지 않았지만.


석기시대의 삶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그는 처음 질문에 대한 궁극의 해답을 얻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난 젊었을 때 현세 인류도 석기 시대로 돌아가 살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나는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내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시켰다. 최근 10년 동안 나는 석기 시대의 생활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직접 체험을 해 왔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난 나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세 인류는 석기 시대 그대로, 자연 상태 그대로 생존하기 불가능하다."


때는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야생에서 벗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낭인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는 베낭 하나 짊어지고 매일 30-40km의 길을 일년 365일 걸어다니며 세계를 여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 여행은 채 시작되지도 못한 채, Gene은 1991년 11월 자신이 만든 오두막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그는 엎어져 있었고 심장엔 칼이 꼽혀 있었다.
검시관은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유서도, 유산도, 왜 죽었는지 힌트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죽었다.


알몸으로 야생 속에 들어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10년 간이나 생존한 뒤 문명 세계로 귀환했던 그가, 허무하게도, 스스로, 순식간에,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에버렛 루스(Everett Ruess, 1914-1934).

아마도 "Into the Wild" 책이 발간되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야생에서 죽은 젊은이'로 기록될 청년이었다.

실제로 "Into the Wild"에도 에버렛 루스의 일대기가 소개돼 있는데, 소개를 안하고 넘어기가 힘들만큼 크리스 맥캔들리스의 성향과 닮아 있다.

에버렛 역시 지적인 가정에서 자라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철학자, 작가 등으로 활동하는 자유인이었으며, 미국 전역을 이곳 저곳 떠돌아 다녔다.

부모의 방랑벽 덕인지 에버렛은 16살 때부터 야생에 심취해 홀로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풍찬노숙은 예사.

그는 걷고 걷고 또 걷다가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먹을 것이 없으면 굶고, 해가 떨어지면 땅위에 그대로 누워 잠을 잤다.

그는 홀로 요세미티 등지를 히치하이킹도 하고 무작정 걷기도 하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 몇 달을 같이 살기도 했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순박했던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그를 맞아준 어떤 이는 자신의 2명의 아들들과 함께 에버렛을 양육할 생각도 했다고.

1931년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자마자 다시 홀로 여행을 떠나 유타, 아리조나, 뉴 멕시코 주를 맨몸으로 떠돌아 다녔다. 당시 이 지역은 현재의 알라스카보다도 더 황량하고 인적이 드문 야생이었다.

그는 서부 지역의 명문인  UCLA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만을 다니고 중퇴하고 말았다.

그는 이때 이미 자연 속에서 살다 죽으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독한 야생의 방랑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자연 속의 길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런 자연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도 방랑은 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가 된다면, 자연의 가장 동떨어진, 가장 외롭고, 가장 황량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움은 이제 저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관조자가 된 기분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온화해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도 친한 친구들이 있지만 이들은 내 기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왜 여행을 떠나왔는지, 왜 혼자 다니고 있는지... 지금까지 너무 혼자 멀리 온 탓일까요.

"전 항상 남들 사는 인생에 불만이었어요. 전 항상 다른 이들보다 치열하고 풍성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에버렛은 한마디로 낭만주의자였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여느 낭만주의자들처럼, 크리스 맥캔들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자기 자신의 안전에 대해선 완전히 무관심이었다.

그가 잠시 알바를 했던 식당의 주인은 에버렛이 절벽을 타는 모험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내 생전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라고 말하기도.

에버렛은 신체적인 위험과 고통을 즐기는 편이었다.

한번은 야생에서 덩굴 독에 감염이 되서 일주일을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열에 시달렸다. 독으로 인해 몸에서 분비물이 쏟아져 나오자 개미떼와 파리떼가 잔뜩 모여 들어 고통을 배가시켰다. 일주일 동안 그는 이렇게 먹지도 못하고 사경을 헤맸는데도 그는 오히려 이를 '철학적인 순간'으로 묘사했다. 그는 매번 덩굴 독에 감염되면서도 그 지역을 떠나지도 않았다. 

크리스 맥캔들리스와 마찬가지로 에버렛은 야생의 가명을 썼다.

니모(Nemo). 해저 2만리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 가명이 1934년 11월 Davis Gulch의 나바호 모래바위에 새겨진 것이 발견됐는데, 그 뒤 에버렛은 영영 세상에서 사라졌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는 1934년 아무 이유없이 Davis Gulch로 모험을 떠났다.

부모에게 "한두달 연락이 안될 것이다"라는 편지와, 그리고 모래바위에 새겨진 "Nemo"라는 닉네임만 남긴채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Gulch 지역의 목동 캠프.

이곳에서 그는 이틀밤을 자고 야생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족과 경찰이 이곳을 시작으로 주변 수십KM를 오랜 세월 샅샅이 수색했으나, 에버렛의 시체는커녕 그의 옷가지 물품 어느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끌고 갔던 당나귀 두마리가 초원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발견됐을 뿐이었다.

오늘날까지 에버렛의 최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왜 당나귀를 두고 떠났는지, 어째서 그렇게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럴 듯한 추론은 정리해 보자면...

1. 절벽을 타다가 떨어져 죽었다 : 에버렛는 절벽을 타는 것을 좋아했고 이 지역엔 모래바위가 많아 바위가 부서지면서 떨어져 죽었을 가능성. 그러나 이 경우 시체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2. 살해 당했다 : 감정 싸움, 혹은 절도 때문에 주변의 목동, 혹은 부랑자들에게 살해돼 물품을 묻히고 사체는 강에 버려졌을 가능성. 상당히 가능성은 높으나 당나귀는 왜 그대로 두었는지 이해 불능.

3. 강을 건너다 빠져 죽었다 : 당나귀를 두고 강을 건너려다 그대로 익사. 자신의 수영 실력을 과신한 덕. 이 역시 매우 가능성이 높으나 과연 그많은 장비와 함께 익사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

에버렛은 60년대까지 미국인들에게 화제거리였다.

60년대 에버렛이 살아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괴담이 떠돌 정도 였다.

당시 괴담에 따르면 에버렛은, 마치 해저2만리의 니모 선장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나바호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최소 한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고.


에버렛과 그의 교통수단. 그는 야생을 탐험할 때 나귀를 즐겨 이용했다.

그의 최후를 목격한 것도 결국 그의 나귀였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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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야생에 들어간서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

전부 아주 천재라는 사람들이며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

그건 문명사회에서 천재였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 총명함이 자연 속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오만함이 이들을 죽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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