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요약:
우주 사물들은 관찰자가 어떻게 관찰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게
보여진다.
빨간 사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빨간 점들이 듬성 듬성 보일뿐
그 나머지는 모두 하얀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
똑같은 사물이지만 겉으로 보았을 때의 거시적인 형상과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의 미시적인 형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과학적 측정 결과는 어떤 측정장치를 쓰느냐,
또 어떤 사람이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다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아니하므로 과학만을 맹신해서는 안된다.
팽이에 검은 줄과 하얀 줄을 번갈아 긋고 팽이를 돌리면
팽이가 회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팽이 자체가 회색은 아닌 것이다.
단지 회색으로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팽이가 회색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관찰자는
실제 팽이의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관(五官)을 통해서 관찰하는 것은 틀린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영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박쥐나 돌고래가 사용하는 초음파를
인간은 전혀 들을 수 없다.
(중략)
종교에서의 교리는 이치에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 현실세계에 반드시 증명이 되어야 한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미시적으로 하나하나 분석을 해보니까
분자(分子)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자를 또 쪼개어 보니까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원자는 양자,중성자,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다. 계속해서 20세기에는 현대물리학의 발달로
이 보다도 더 작은 소립자들이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요소라는 것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립자들은 아주 특이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다.
입자라는 것은 질량(무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게가 없는 것은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소립자는 어떤 때는 무게를 가지고 있고
어떤 때는 무게가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놀랍게도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구조는 거의 전부가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원자의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핵에서 떨어진 바깥 테두리에 전자가 돌고 있다.
이 모습을 상암운동장에 비유를 하자면 원자핵은 콩알 하나이고 전자는 먼지보다도
작은 것이 상암운동장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냥 텅 비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질의 기본 요소인 원자가 99.99999% 비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벽이나 사물들이 말 그대로 그냥 텅 비어있다는 이야기다. 내 몸도 역시
텅 비어있는 상태이다. 벽도 비어있고 나도 비어있다면 내가 벽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그렇게 통과할 수 없는 이유는 벽에 있는 전자도, 내 몸에 있는
전자도 마이너스 전극을 띄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반발력으로 인하여 쉽게 통과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질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겉으로 보고 느끼는 것하고 그 이면에 실재하고 있는
모습하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발력 때문에 딱딱하다고 느낄 뿐이지
실제로는 벽이나 물이나 공기나 다 비어있는 상태이다.
2부 요약: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 '광양자설'은 빛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빛이 동시에 두 성질을 모두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같은 빛으로부터 입자의 성질을 알아보기 위한 측정장치를 갖다 대면
입자의 성질이 나타나고, 파동의 성질을 알아보기 위한 측정장치를 갖다 대면 파동의
성질이 나타난다. 측정장치로 측정을 하기 이전에는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야구장에서 '야구선수의 마음'과 같다.
야구장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는 스트라이크를 던질지 볼을 던질지 커브를
던질지 뭘 던질지 아무도 모른다. 투수가 실제로 공을 던졌을 때만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알 수 있지, 공을 던지기 전에는 모든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 오른쪽으로
던질 가능성, 왼쪽으로 던질 가능성, 높이 던질 가능성 등의 가능성만이 있다.
이와같이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자연현상들 역시 가능성
으로만 존재하고 있는데 관찰자가 관찰하는 순간 비로소 그러한 하나의 현상으로써
관찰되어진다. 내가 관찰하고 경험하기 이전에는 어떠한 현상도 없다. 그냥 가능성
으로만 잠재되어 있다.
가능성으로만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공(空,○)이다. 공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오직 가능성만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만
존재하는 상태, 이것이 공(空,○)이다.
무색의 빛이 프리즘이라는 유리 삼각체를 통과하게 되면 빨,주,노,초,파,남,보의 빛깔로
나타난다. 프리즘을 갖다 대기 전에는 여러가지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회색 빛깔의 옷을 회색으로써 인식하는 이유는 그 옷이 회색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반사되어진 회색 빛을 우리 눈이 봄으로써 비로소 회색의 옷으로 보여진다.
옷 자체가 회색인 것이 아니다. 무색의 태양빛이 옷이라는 하나의 조건에 반응하여
회색으로써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도 어떤 조건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색깔뿐만이 아니라 물질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이다. 본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공(空,○)의 상태에서
내 마음이 만들어낸 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운
것이 추하게 보일 수도 있고, 추한 것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가능성만 있는 공(空,○)의 상태에서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서 그러하게 나타나진다. 관찰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공(空,○)에서 나타난 허상들이다.
인식의 한계.
주관과 객관을 분리함으로 해서 모순이 생긴다. 나와 내가 관찰하는 대상을 항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어느 절에 조실스님이 한 수좌한테 저쪽 방에 가서 그 방이 비어있는지 아닌지 보고
오라고 했다. 수좌는 조실스님이 시킨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살펴보니 방 안에
아무도 없길래 다시 와서 조실스님께 아뢰길 방이 비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조실스님은 수좌를 크게 꾸짖었다. 왜 꾸짖었을까?
수좌가 빈방에 들어간 순간 그 방은 이미 빈방이 아니다. 그 수좌는 주관을 가지고
객관을 봤기 때문에 그러한 모순이 생긴 것이다.
만약 그 수좌가 '자기(自己)'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방에 들어갔다면 '빈방'이라는
것이 성립이 된다. '나'라는 주관과 내가 보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으면 결코 참다운
관찰을 할 수가 없다. 진리에 닿을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서
관찰하기 때문에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논리의 한계.
'이발사의 모순(Barber Paradox)'이라는 이야기로 논리적 사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세계적인 사상가이며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20세기의 가장 큰 혁명은 동양의 불교가 서양에 전파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3차원과 다차원, 공간적 인식의 한계.
0차원은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차원은 직선이다. 2차원은 면(面)이다.
2차원의 평면에서만 활동하는 개미에게는 '점프'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 보다 몇
배나 큰 먹이를 물어 나를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건너편으로 점프를 한다거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빵조각을 취할 줄 모른다. 평면을 뛰어 넘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3차원은 각설탕과 같은 정육면체를 말한다. 2차원적 존재한테는 3차원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주려 해도 인식시킬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4차원의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금고 안에 금덩이
가 들어있는데 3차원 인간의 상식으로는 금고를 부수지 않는 한 금덩어리를 꺼낼
수가 없다. 그러나 4차원에서는 그냥 슥 집어 낼 수가 있다.
마치 개미는 건너편에 있는 빵조각을 못 먹지만 인간은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듯이,
금고 속에 있는 금덩이를 인간은 꺼내지 못하지만 4차원의 존재는 그냥 쉽게 꺼낼
수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버린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
하지 못한다. 시공을 초월할 줄 모른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만약에 어린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동굴 속에서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게 한다면
그 아이는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실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2차원 밖에 모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3차원 세계에 인식이 고정되어져
왔기 때문에 3차원 밖에는 모른다. 3차원 세계를 실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을 실상으로 생각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실상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원을 넘어서는 것, 시·공을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가 흔히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그 별이 지금 현재 그 위치에서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시일 뿐이다. 빛은 1초에 300,00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을 하는데 그 속도로 1년도 아니고, 100년도 아닌 몇억 년을 가야하는 먼
거리에서 별들이 빛을 내고 있다. 우리가 보고있는 밤하늘의 별빛은 지금 현재에
빛나고 있는 별빛이 아니라 이미 몇억 년 전에 그 별에서 발산된 빛을 이제서야
우리가 지구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수억 년 전의 별빛을 이제서야 보고 있는
것이기에 그 수많은 별들 중에는 지금 현재 이미 다 타서 없어진 별들도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반짝이는 별들은 실재가 아닌 허상이다. 지금 그 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저쪽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는데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쪽에서 빛이 반사되어 오는 시간만큼 과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사물들의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다. 실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허상을 보고 있다.
금강경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 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다. 실상이 아닌 허상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공성(空性) = 성품이 비어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모든 현상은 그것을 주관하는 주체가 없으며, 모든 것은 실상이 없으므로 공(空)의
성품이라는 것은 어떤 확실한 주체를 가질 수가 없다. 가능성만이 있다.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 나무 등을 다 해체하고 나면
그 집은 없어진다. 여기서 집은 없어지지만 벽돌과 같은 기본 구성 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그 기본 구성
요소들도 역시 없는 것이다. 그것이 공성이다.
중도(中道).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기 전의 상태, 가능성만 있는 전체로써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비어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다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조건에 따라서 무한히
나타날 수 있다.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대한 바른 해석: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지 않으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야 한다.
아상, '나'라는 생각, 나와 남을 분리하지 말고 남이 아픈 것을 내가 아픈 것과도
같이 여겨야 한다. 인상, 사람이라는 우월감, 말 못하는 짐승들이라 하여 업신여
기지 말아야 한다. 중생상, 동물 뿐만이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라 하여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수자상, 생명체라는 우월감, 돌덩이와 같이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라 하여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낱 보잘 것 없는 돌맹이라 할지라도 내 육신과 마찬가지로 원자,양자,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는 온 우주의 법칙과 온갖 현상들이 그대로 다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무생물인 돌맹이라고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각각에 대한 분별심과 우월감을 내려 놓았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마침내 온 우주 만류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무법상(無法相).
진리 자체,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진리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진리란 이런 것이다'하는 그 생각 마져도 없애야 한다.
'진리란 이렇다'하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참진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집착이다.
법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역무비법상(亦無非法相).
그렇다고 해서 '법이 없다'라고도 하지 말아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 안에도 시방세계, 온 우주 만류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하찮은 티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수많은 분자,원자,양자,전자가 끊임없이
돌고 있고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무생물이라고 무가치하게 생각들 하지만
실제로 그 속에는 온갖 우주적 대 사건들이 다 일어나고 있다. 티끌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며, 우주와 상통하고 있음이다.
끝으로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개념을 뛰어 넘어야 하고,
공간이라는 개념도 뛰어 넘어야 하며,
무엇보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아닌 하나로써 전체를 관(觀)해야 한다.
- 끝 -
兩在十方空裡浮 (양재시방공리부)
浮不取空空不浮 (부불취공공불부)
元無一事掛心頭 (원무일사괘심두)
모든 것이 다 공(空,?)의 나타남이라네
일체 현상과 공은 서로가 집착함이 없으니
원래 마음에도 걸릴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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