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론

전인권

낙동대로263 2015. 8. 5. 10:02

 

 

마약 중독자서 바른생활 로커로 재기에 성공한 '록의 전설'


"예술이 뭐냐고? 자신이 갖고있는 쾌감을 끝없이 찾아가는 거야"


자유를 즐기려면
법칙이 있어야해
그게 박자야
젊은 시절 나는
반항하고 저항했는데
그게 꼴불견이었지
인생의 박자를
알고나니
삶이 풍요로워지더군


5번 구속, 정신병원 16개월
내 무절제 보다못한 아내가
입원시켜 재활치료 받았어
아내 사랑 덕에 새사람 됐지


김연아에게서 영감 얻어요
연아가 같은 동작 반복하며
열심히 하는 것처럼
우린 그렇게 살아야 해요


나의 자존심 선글라스
DJ시절 청와대에 갔더니
경호원이 선글라스 벗으래
벗어야하면 그냥 간다했더니
싱겁게 들어가세요 하대

 

인터뷰를 마친 들국화의 전인권이 자신의 휴대전화에 기자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배경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문 사자 머리의 마흔여섯 전인권이었다.

지금보다 말랐고, 창백했다. "4번째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된 직후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2000년이다.

"일가친척에게 나쁜 놈이 됐고 주변에 쪽팔리니까 그거 만회하려고 한겨레신문 맨 뒷면에 3번 (사과) 광고를 냈어. 자비로. 얼마 썼는지는 비밀. 그때 쓴 사진이야."

마약하다 적발되고 사과 광고라니. 정말 '마약해서 죄송합니다' 란 문구로 광고를 냈을까.

"아니, (사진 위의 사과 문구는) 국산 담배를 애용합시다! 하하. 아무것도 안 쓰고 그것만. 광고를 내서 많이 만회했어. 빵(감옥)에 들어가서도 사과 광고 하고 들어오길 잘했다 싶었지."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왜 그 시절 사진을 입력했을까. 잊고 싶은 시절일 텐데.

"잊지 않으려고. 이걸 보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자신에게 엄격하자. 나한테 까다로워질 거야, 앞으로도 계속."

7일 환갑의 전인권을 만났다. 사방으로 솟구친 사자 머리 대신 머리를 뒤로 넘겨 단정하게 묶은 차림새였다. 부인 정혜영(57)씨를 동반한 전인권은 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말을 잘 못해서 좀 적어 왔어. 보면서 해도 괜찮지?"

‘들국화’다시 피었습니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살아 있는 록(rock)의 전설’ 전인권이 의자에 거꾸로 앉아 있다. 그는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난 똑바로도 살아봤고 거꾸로도 살아봤다”며 “다양하게 해보고 나니 이제야 길이 좀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뭐든 다양하게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거다. 뭐든 다 해봐야 한다고. 아참! 마약은 빼고.”
‘들국화’다시 피었습니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살아 있는 록(rock)의 전설’ 전인권이 의자에 거꾸로 앉아 있다. 그는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난 똑바로도 살아봤고 거꾸로도 살아봤다”며 “다양하게 해보고 나니 이제야 길이 좀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뭐든 다양하게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거다. 뭐든 다 해봐야 한다고. 아참! 마약은 빼고.” / 이덕훈 기자

 

 

다시 핀 들국화

작년 4월 들국화 콘서트. 1987년 해체 이후 사실상 처음 열린 장기콘서트에 대해 조선일보 한현우 기자는 "26년간 책갈피에 납작 말라 있던 들국화가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고 썼다.

"인상 한번 안 쓰고 올리는 그의 초고음은 멸종된 고대 동물의 울부짖음 또는 알 수 없는 기계 장치에서 나는 굉음처럼 들렸다. '행진'이 다시 연주되면서 관객이 모두 일어나 노래를 합창했다. 그러나 400여명이 기를 쓰고 부르는 노래를 전인권의 보컬이 고압 전류처럼 꿰뚫어버렸다. 사람들은 전인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즐겁게 좌절했다."

전인권은 1987년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5번 감옥에 갔다. 그는 당시를 "마약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로 기억했다. 술과 도박에도 빠졌다. 절제 없는 생활은 목소리를 앗아갔다. 고음은 쇠 긁는 소리로 전락했고, 큰 성량은 소음이 됐다. 마약에 취해 가사도 기억을 못 했다. "전인권 끝났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전인권은 그 시절이 "송두리째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14년 전 사진을 입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절제의 종착역은 정신병원이었다. 부인 정씨는 대마·필로폰에 이어 모르핀까지 손댄 남편을 2010년 5월 강제로 전남 담양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엔 얼마나 계셨나요?

"1년 4개월 17일. 정확히 기억해. 정말 끔찍해서 죽는 거만 생각했어. 심장마비로 죽은 마이클 잭슨이 부러웠어. 총을 맞고 아파하다가 죽어도 이거보다 낫겠다 싶었어, 진짜." (마이클 잭슨은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사망했다.)

―조금씩 중독에서 벗어났는데.

"그래도 희망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 노래할 생각은 아예 접었고. 저작권이 조금 있으니까 그냥 그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지금 이 시점에서 그만두면 그래도 좋은 이야기를 들을 것 같다. 그동안 후지게 논 건 없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

입원한 지 16개월이 지나 중독에서 벗어난 전인권은 퇴원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다. 이혼한 상태였고, 수중엔 돈도 없었다.

"별수 없이 아내랑 살던 집에 갔지. 마누라가 있더라고. 너무 잘해줬어.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라고 하더라. 그 순간, '진짜 제대로 살아야겠다' 마음먹었어. 마음이 너무 뭉클해서. 내가 잘 표현 못 하지만, 내 인생의 일생일대의 순간이었어. 뭔가 쨍하고 비치더라고. 에이 여기까지. 우린 이런 이야기 잘 못해. 하하."

 



나에게 엄격하게, 까다롭게

2011년 9월 정신병원에서 나온 전인권은 재기에 나섰다. 그 무렵 큰딸이 결혼했다. "미술을 하는 큰애가 내 광신도를 자처하는 사위를 데려왔어. 마찬가지로 미술 하는 사람이었지. 아주 좋았어. 얘네한테 또 손자한테도 꼭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어떻게 노력하셨어요?

"나한테 엄격해지고 까다로워졌지. 규칙적으로 생활하기 시작했어. 전과는 아주 다르게. 일단 8~9시에 잤어. 1년 동안은 3시간씩만 잤어. 낮잠 1시간 더 자고. 괜찮더라고. 요즘은 5~6시간까지 자는 시간을 늘렸고, 여전히 낮잠도 자. 밥을 제시간에 먹으려고 하고. 규칙을 지키는 건 먹는 거부터 지키는 게 시작이야."

―식성이 까다롭다는데.

"아닌데, 누가, 누가! 내가 언제 까다로워. 맛있는 걸 좋아하지. 주관이라고 하나, 철학이라고 하나. 하루 세끼는 맛있는 걸 먹자."

―제일 맛있는 음식은?"

"집에서 마누라가 해주는 거. 그래서 주로 집에서 먹어. 오늘 꼬막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물론 마약은 안 할 테고, 술은?

"안 마셔. 술자리에서도 콜라를 마셔."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음. 고백하면 한 잔 먹었어요. 마누라가 남긴 거. 위스키였는데 아주 좋더라고. 정말 이게 다야."

―그랬더니 목이 돌아오던가요?

"돌아오더라고. 전성기 때와 비교해봐도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아. 전반적인 건강 상태가 더 좋은 건 모르겠고 노래를 할 때는 확실히 더 나아졌다, 이거니까. 원숙미가 있다? 이런 이야기 들어. 많은 사람이 좋아졌다고 그러고. 나도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

―목소리가 돌아오니 전성기가 됐다?

"소리만 깨끗하게 나온다고 전성기로 돌아가는 건 아냐. 리듬감이나 표현감이나 이런 것까지 다 돌아와야 전성기 때로 회복했다, 부활했다고 할 수 있는 거거든. 경험을 바탕으로 회복한 거지."

―경험이 바탕이 됐다는 뜻은?

"예전엔 많이 부르는 걸로 해결했어. 잘 안되면 불러서 뚫었단 말이야. 내가 전인권이니까. 근데 그게 (전인권다운 모습을 못 보여줄까 봐) 불안해서 그런 거야. 내가 진짜였으면 안 그랬어. 목이 불안하니깐 자꾸 센소리로 불러서, 질러서 맑은소리를 만들어내려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매일 노래를 세게 했지. 소리 지르고. 근데 이젠 방법을 바꿨지. 좀 더 듣는 걸로. 들으면서 입술의 모양, 혀의 위치, 소리가 나는 곳, 이런 것들을 찬찬히 살피게 됐어. 좀 더 침착해진 거지. 그게 다 어우러져서 지금이 된 것 같아."

 


내 인생의 박자

그는 갑자기 '박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두산백과사전은 박자(拍子)를 "센박과 여린박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면서 형성되는 리듬의 기본적 단위"라고 설명한다.

"박자가 있어야 해. 음악은 물론이고 사는 것도. 법칙이 있으면 자유롭지는 못해. 하지만 무난하게 자유를 즐기려면 그런 법칙이 있어야 해. 그게 박자야. 그게 내가 깨달은 거고. 그걸 깨달아서 내가 변했거든. 예전에 연세대에서 강연을 해 달래. 나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행성으로의 탈출'이란 강연 제목을 달았어요. 그래서 강연을 내 맘대로 했어. 박자 이야기. '박자를 알면 모든 게 좋아진다. 그게 행성으로의 탈출의 길이다.' 이렇게."

―정말 모든 게 변해요?

"응. 삶도 변하고 음악도 변하고. 박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야. 음악으로나 삶에서나 그전까진 그게 그렇게 중요하단 걸 잘 모르고 살았더라고. 박자를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게 엄청 싫었어. 무작정 엄격하게 땅·땅·땅 치는 게 싫었던 거지. 그래서 반항하고 저항하고. 그게 꼴불견인데 그걸 몰랐어."

―인생의 박자에 충실해진 거네요?

"그렇지."

―멋지시네요.

"아유, 고마워. 하하하. 내가 잘 말하고 있나?"

―인생이 어떻게 변하던가요?

"'풍요로워졌다'란 표현이 좋을 것 같아. 절제된 생활이 나에게 힘을 주거든. 뭐든 위대한 걸 하려면 지구력이 필요해. 난 그림이랑 음악밖에 모르지만, 지구력 없이 되는 게 없어. 절제가 그걸 길러주더라고."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규율을 안 지키면 때리는 학교가 너무 싫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서울 마포구의 한 공연장에서 들국화의 리드 보컬 전인권(앞줄 오른쪽)이 베이시스트 최성원(앞줄 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무대 뒤편에선 고(故) 주찬권이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이날 공연은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지난해 4월 서울 마포구의 한 공연장에서 들국화의 리드 보컬 전인권(앞줄 오른쪽)이 베이시스트 최성원(앞줄 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무대 뒤편에선 고(故) 주찬권이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이날 공연은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 들국화컴퍼니 제공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들국화는 작년 12월 새 앨범 〈들국화〉를 발표했다. 박자론은 이 앨범에 수록된 그의 노래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보다 박자를 지키고, (박자를 깨는) 파격을 남발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랬더니 피곤하지 않아. 최대한 요약을 한 거야. 남용 없이 요약을 한 거지. 요약이 재미있어. 요약이란 게 뭐냐면 '걷는 데 꽃이 있는데 뭐 어쩌고저쩌고' 이런 거 다 없애고 그냥 '걷고~' 하면 되는 거야. 느낌을 잘 살리면, 부를 때 잘 부르면 대중은 느끼거든."

―절제인가요?

"응. 그래. 그런데 요약이라고 써주면 더 좋겠어. 같은 말이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까 스스로 '내가 음악 할 자격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

―지난 시간을 후회하나요?

"후회도 하지. 그 시간 그렇게 보냈으면 안 됐는데."

그는 "성실해지기로 마음먹은 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무엇을 인정했다는 건가요?

"사람들이 간혹 나보고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고 했어. 요즘 들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술을 안 마시는 것도 그걸 인정해서야. 과거엔 손에 닿으면 (마약이든 술이든) 그 자리에서 다 하는 사람이란 걸 인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요샌 받아들여. 예나 지금이나 내 성격은 물가에 내놓은 애야. 그러니깐 술도 안 마시게 되는 거야."

―태도의 변화가 있다면?

"전엔 누가 나한테 뭐라 하는 게 무조건 싫었어. 근데 지금은 달라. 내가 먼저 물어보고. 말을 듣지. 마누라한테도. 성원(들국화의 동료 멤버 최성원)이한테도. 그리고 나한테 엄격해지고 까다로워지니까 (음악이) 더 재밌더라고. 그렇게 실컷 음악을 한번 해보고 싶어."

―가장 잘한다고 평가하는 후배 가수는?

"게이트 플라워즈. 내가 돈을 좀 벌면 이 친구들 공연이나 앨범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록을 제대로 하고 있어."

―늘 선글라스를 쓰는데.

"김대중 대통령 때 청와대에 갔는데 경호원이 벗으라고 했어요. 안 벗었지. 왜냐고? 내 자존심, 프라이드, 프라이버시 그런 거.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내 스타일, 내 자유인데. '이거 벗으라고 하면 돌아간다'고 했지. '그럼 그냥 들어가세요'라고 그러더라고. 싱겁게."

―대통령 반응은?

"대통령이 안 나오셨어. 이희호 여사만 나오셨어. 하하."

―선글라스는 폼인가요?

"아니요. 이건 좀 실질적이야. 공연을 할 때 내 눈을 보인다는 게 신경쓰일 때가 있거든. 조명도 들어오고. 그런 게 내가 실력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정말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글라스가 있든 없든 잘할 거 아니에요. 그냥 인정하기로 했어. 나는 선글라스를 껴야 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객도 인정해 주겠지."

―전인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있다면?

"음악과 미술, 예술이지. 예술에 대해 메모해 놓은 게 있어. 뭐냐면 '자신이 갖고 있는 쾌감을 끝없이 찾아간다'는 거야. 그런데 '끝없이'란 부분이 슬픈 거야. 다른 사람이 뭐라든 거기에만 끝없이 충실한 거야."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가는 것?

"그렇지. 도달과 상관없는 거야. 간다는 게 중요한 거야."

―요즘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요?

"김연아. 김연아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해요. 지금은 그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아, 주찬권!

납작 말라 있던 들국화가 다시 꽃으로 피어난 직후, 3인조 들국화의 동료 멤버이자 드러머 주찬권이 숨졌다.

원인 불명의 급사였다.

26년 만의 들국화 재결성도 사실 주찬권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정신병원을 나온 전인권을 찾아간 것도, 제주도에 사는 최성원을 찾아간 것도 주씨였다. 소속사 관계자는 "그의 노력 때문에 들국화 재결성이 가능했다"며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떠나 유작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때의 충격은… 정말 충격이었어.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으니까." 전인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주찬권은 어떤 존재였나요?

"인간미 넘치는 동생이었어. 한 살 어렸지만 마음이 넓었고, 다 포용하고. 운동신경도 좋아 당구도 잘 치고, 뭐든 못하는 게 없었는데, 또 수줍음은 많았어. 보고 싶네."

―주찬권과의 기억은?

"공연을 시작하면 찬권이가 꼭 첫 곡으로 부르자고 주장하던 곡이 있었어. 'He Ain't Heavy, He's My Brother'(그는 짐이 되는 사람이 아녜요, 그는 내 형제예요). 내가 이 곡을 처음에 부르면 자기 마음이 편안해진다나. 그래서 내가 물었지. 왜 이 곡이 마음을 편하게 하느냐? 그랬더니 이 노래가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s(그 길은 많이도 굽어 있는 멀고도 먼 길입니다)하고 시작하거든. 근데 이 부분이 처음부터 쫙하고 올라가야 해. 찬권이 말이 내가 이 부분을 잘 올려 부르면 마음이 놓인다는 거야."

―전인권의 컨디션을 확인했군요.

"그래, 내가 사고뭉치라서 그날 공연을 망치지는 않을지 늘 걱정했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이 곡을 쫙하고 올리면, 찬권이가 '이제 됐다. 오늘 공연 잘하겠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았던 거지. 자기 워밍업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그랬던 거야. 내 컨디션을 봐서 자기가 드럼으로 받쳐주고 끌고 가려고. 그런 사람이었어."

최근 앨범 〈들국화〉에 수록된 곡 '하나둘씩 떨어져' (작곡 주찬권, 작사 전인권)는 주찬권이 숨진 다음에 가사를 붙였다.

"찬권이가 죽기 전에 내가 후렴구 가사 전까진 대충 썼는데, 이게 운명인 건가. 이게 계속 안 써지는 거라. 그러고 있다가 찬권이가 갑자기 갔어. 그래서 슬픔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찬권이가 어디 갔나 찬권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사를 붙인 거야."

주씨의 장례식 이후 녹음된 이 곡에서 전인권은 유독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길 건너 층층계로

낙엽에 하나둘씩 떨어져

거리에는 멈추어진 불빛들

저 끝에 지금의 나

길마다 내가 버린 내 얼굴

아~ 내 청춘



[한국 최고 록밴드 '들국화'… 1집 '행진' 80만장 大히트]

'한국 록의 전설' 들국화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록밴드로 꼽히는 그룹이다.

전인권, 최성원, 고(故) 주찬권 등이 1985년에 결성해 그해 1집 '행진'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80만장이 팔리며 수록된 모든 곡이 히트했고, 2007년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위에 선정됐다.

다음 해 2집 '너랑나랑'을 선보였으나 실패하자 1987년 해체했고, 26년 만인 2013년 재결합했다

 

 

 

'음악- 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J 에게 / 이선희   (0) 2015.08.15
2015. 8. 13 (목) 영화의 전당 공연  (0) 2015.08.14
선물 받은 팬플룻  (0) 2015.08.04
비목 / 악보  (0) 2015.06.20
먼 훗날 / 악보  (0) 201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