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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 끝내지 않는다

낙동대로263 2022. 2. 25. 20:32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다루는 방식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놓고 영국·프랑스 동맹과 대결하던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푸틴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과거의 영광을 재연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새로 생긴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졸지에 소수민족이 돼 핍박받는 처지가 됐다고 주장하는 동포들이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 이웃 나라가 침략을 당하더라도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쟁까지 각오하고 지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독일군 병사들

오스트리아 합병에 이어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를 집어삼킨 히틀러는 "더는 영토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국토마저 점령한 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폴란드 국립디지털아카이브 제공·EPA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1933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점차 본색을 드러내 국내에서 독재 체제를 확립해 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질서를 규율한 베르사유 체제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처음에는 은밀히, 나중에는 대놓고 군비를 증강해 종전협약을 어겨도 저지하지 못했다. 1936년 3월 독일군이 비무장지대로 규정된 라인란트에 진군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2년 뒤에는 같은 독일어권이지만 엄연히 주권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보내 강제 병합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번에도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에서는 말뿐인 항의 이외에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그러나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침략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을 때 영국·프랑스 동맹은 또 한 번의 용인과 전쟁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히틀러가 내세운 구실은 독일과 인접한 주데텐란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에 핍박받고 있으니 이를 응징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독일 신문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행된 독일인 '학살' 뉴스로 도배되고 있던 그해 9월 초 히틀러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75만 대군을 체코슬로바키아 접경지대에 투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군사동맹인 프랑스의 참전은 불가피해지고 프랑스의 동맹인 영국도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데텐란트의 친나치 민병대

지난 2018년 뮌헨협정 80주년 기념행사에서 주데텐란트의 친나치 민병대 '주데텐란트 자유군단' 대원으로 분장한 참가자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전쟁을 막기 위해 히틀러와 협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였다.

체임벌린의 생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땅 일부를 떼어 주고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만 손에 넣는다면 다시는 영토에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히틀러가 제시한 '최후통첩' 시한이 임박해 전쟁의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던 1938년 9월 27일 체임벌린은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머나먼 나라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벌이는 다툼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기이하며 믿기 힘든 일입니까." 참고로 런던에서 '머나먼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까지 직선거리는 1천32㎞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주선으로 1938년 9월 29일 독일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이 열렸다. 참석자는 히틀러, 무솔리니,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였다.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예정일을 하루 앞둔 9월 30일 새벽 이들이 서명한 뮌헨협정에 따라 결국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할양됐다. 당사자이면서도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이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홀로 나치 독일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시대의 평화'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의 한 장면. 1938년 9월 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한 뒤 귀국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제레미 아이언스 분)이 환호하는 군중에 협정 문서를 내보이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채 1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넷플릭스 코리아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뮌헨협정 체결을 사실상 주도한 체임벌린과 다수의 영국인은 이로써 평화를 얻었다고 진정으로 믿은 모양이다.

귀국한 그는 공항에서, 또 총리 관저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짧은 연설을 했다.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평화를 가지고 명예롭게 귀환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평화롭게 주무십시오."

 

1878년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종결 방안을 논의한 베를린회의에 참석했다 귀국하면서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연설했는데 '두 번째 총리'란 이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러나 뮌헨협정 체결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평화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토에 욕심내지 않겠다"던 공언과 달리 히틀러는 곧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국토마저 집어삼켰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전면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기어코 유럽 전장에서 2차대전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전쟁을 막지도 못했으면서 굴욕만 당했다는 비난 끝에 체임벌린은 총리 자리를 잃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머나먼 나라' 연설과 '우리 시대의 평화' 연설은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됐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연설의 반열에 올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드라마가 2022년 우크라이나로 배경을 바꿔 리메이크된다면 누가 보더라도 히틀러가 맡았던 역할을 이어받을 이는 푸틴일 것이다.

그러나 푸틴의 상대역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뮌헨협정으로 시간을 번 덕에 영국과 동맹국들은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자막과 함께 끝난다.

 

학계에서는 같은 관점에서 체임벌린을 굴욕조차 감수할 줄 알았던 현실주의자로 평가하는 견해도 만만찮다.

현대판 체임벌린이 어떤 캐릭터가 될지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드라마의 결말까지 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