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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낙동대로263 2020. 6. 19. 09:40

    by 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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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칠십 년이 더 지났다.

같은 땅, 같은 민족으로 살면서도 우리는 지구상의 수많은 '먼 나라 이웃나라' 보다 더 멀고 낯선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왔다. 오랫동안 다른 정치, 경제 제도 아래서 도저히 상존하기 어려운 이질감을 느껴왔지만 최근에는 분단의 고통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낙관적 견해가 우세해졌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 간 전례 없이 남북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빈번해지고, 예술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공동으로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한반도기(旗)와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이다. 그런데 그 '하나'라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 하나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토', '하나의 문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다 보면 "그 하나가 하나가 아니다."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그 차이는 바로 그들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2002년 남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라고 기억된다.

축구경기를 방송으로 중계하는데, 남측의 아나운서가 "상대팀 플레이어가 코너킥 한 볼을 골키퍼가 잡아냈다."라는 말을 북측의 아나운서는 "상대팀 선수가 구석차기한 공을 문지기가 잡아냈다."라고 말했다. '구석차기'나 '문지기'라는 단어는 영어 'corner kick'과 'goal keeper' 의 북한식 표현이자 우리말이다.

이것은 외국에서 온 스포츠 용어에 대한 사소한 번역의 문제이지 말의 본 뜻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옆자리에 앉은 북한 응원단이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나 꼬부랑국수(라면)를 먹고 싶다."라고 말해도, 그것이 익숙지는 않겠지만 같은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라 서로 간의 의사전달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언어의 차이는 다른 데서 발견된다.

북한에서 온 응원단이 버스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다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들은 길가의 현수막에 그려진 그들 지도자의 초상화가 비에 젖어있는 것을 보고, "우리 어버이 원수님의 얼굴에 물이 묻어있다니..."하고 통곡하며 몸부림쳤다고 한다. 참으로 놀랄만한 사건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쇼였을까?

아니다. 언어의 한 표현이기도 한 상징물에 대해 그들의 보인 유별난 반응은 바로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意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그 사건에 대해 북한 사람들과 몇 차례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주제에 대해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어의 의미가 전달되어야 하는데, 중요한 개념에 대해 그들과 이해를 공유할 수 없었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언어에 심각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72년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었던 남북조절위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양에서 열렸던 제2차 회담에서 우리 측 대표 중 한 사람이 토의 중 목이 말라 북측 수행원 중 한 여성에게 "아가씨, 물 한 잔만 부탁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북측 대표단이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기서 '아가씨'란 말 쓰면 안 됩니다. 그건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럼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냥 '접대부'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 당시 북측 사람들은 '아가씨'라는 말이 남한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쯤으로 여긴듯 하다.

'아가씨'는 원래 시집 간 여인이 남편의 오누이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이것이 변용되어 남한에서는 미혼의 젊은 여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고, '접대부(接待婦)'라는 용어는 그들이 말하는 '아가씨'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하기야 그 시절만 해도 우리는 북한을 붉은 공산당이 판치는 '북괴'라고 불렀고, 그들 역시 남한은 미국 제국주의 하수인들이 판치는 '남괴'라고 불렀다. 우리는 실상 꼭 같은 괴뢰들이었나, 아니면 같은 단어인 '괴뢰(傀儡, 꼭두각시)'를 북과 남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했는가?

아마도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DPRK: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과 남한의 국호인 '대한민국(ROK: Republic of Korea)'에 함축된 '민주주의', '공화국'의 개념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남과 북의 언어를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얼마 전 북한 매체에 쓰인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젊은이와 늙은이가 함께 즐겁게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거기서 '젊은이'는 한자 '청년(靑年)'을, '늙은이'는 '노인(老人)'의 우리말 번역이다. 만약 남한에서 노인을 늙은이로 대체해서 사용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쪽의 사람들은 '늙은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 더럽고 추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실제로 '노인정(老人亭)'이나 '경로당(敬老堂)'을 '늙은이의 집'이라고 하면 노인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男子)'를 '사내'로 표현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지만 '여자(女子)'를 '계집'으로 표현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계집'이란 단어는 상대방을 천시하고 비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요즘 같으면 그 발언 자체가 성희롱으로 간주될 것이다.

 

북한 용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말을 지키려는 그들의 열정을 알 수 있다. 북한 말에는 고집에 가까운 우직함과 함께 섬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불필요한 외국어의 도입을 극도로 억제하고 있고, 불가피할 경우에도 단순성과 일관성에 입각하여 외국어의 의미에 대응하는 최적의 우리말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화환경에 따른 말의 변용은 다양하다. '동무' '노동' '이념'과 같은 개념들이 남과 북에서 변질되어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말의 변질, 심하게 말하면 말의 타락은 여기가 더 심각하다.



최근 남한에서는 나이 든 사람도 자신의 어버지를 '아빠'라고 부른다. 내가 어릴 때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구청 민원봉사실에 가면 내 자식도 아닌 공무원이 나를 '아버님'으로 부른다. 나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파출소에 가면 누구나 선생이 된다. 시장에 가면 남녀 고객 모두가 '사장님' 아니면 '사모님'이다. '아저씨' '아주머니'가 낮춤말인가? '선생'이란 호칭을 강도 용의자에 붙여도 되는가?

언제부터인가 남한의 우리말이 급속도로 다른 나라의 말로 대체되고 있다. 길거리의 간판들 중 태반이 알쏭달쏭 한 외국의 글들이고, 정체불명의 마구잡이식 언사가 세간을 누비고 있다. 한때 한문을 '진서(眞書)'라고 하고 한글을 언문(諺文)으로 낮추어 불렀던 것처럼, 지금은 평상시의 대화에도 외국어가 섞여야만 유식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업을 리뉴얼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어젠다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 컬춰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함부로 코스프레해서는 안된다."

"정치인의 미장센과 셀프디스."

며칠 전, 제572돌 한글날을 맞을 즈음, 누구보다도 우리말 표준어를 전달해야 할 신문과 방송의 기사제목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인터넷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국제화 흐름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언어에는 가변성과 불변성, 표면성과 심층성의 양면이 있다.

언어 현상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언어 기능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공유하는 언어는 바로 그 민족의 공통된 삶을 빚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의 심층구조는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를 지배한다. 민족의 동질성이란 무엇보다 같은 언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분단 칠십 년의 역사가 남과 북의 말과 의식 구조를 그토록 갈라놓았을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어 이천 년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토라(Thora)와 같은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지키며 그들의 언어를 보존해왔고, 지금은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른바 강소국(强小國)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나의 언어가 없으면 남의 언어도 없다. 나의 문화가 없으면 남의 문화도 없다. 진정한 국제화(internalization)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화(localization)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다!" 남과 북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이 거창한 구호가 펼쳐지는 순간에도 바로 그 하나인 민족의 동질성이 파괴되고 우리의 언어가 분열되고 있다.

통일은 와야만 하고 또 반드시 올 것이다. 하지만 휴전선의 철책을 걷어내기 보다 남북 언어의 장벽을 걷어내는 것이 더욱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