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 말

막 핀 봄꽃 앞에서 봄꽃이 지는 환영을 보며 - - - 박범신

낙동대로263 2019. 4. 22. 08:51


봄꽃이 막 피어났는데 나는 봄꽃이 지는 환영을 본다.

나의 이런 슬픔은 아주 오래 되었다.

탄생 이전에 부여받은 슬픔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허무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만약 당신이 오로지 지금 핀 꽃만을 볼뿐이라면 당신이 당장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축약해 보라. 인생이란 쉬임없이 크고 작은 이별을 켜켜로 쌓는 일에 불과하다.

피는 꽃과 지는 꽃 사이, 그 이별이야말로 곧 삶이고 시간의 여일한 눈금이다.

만남이 쉬운 사람 있고 이별이 쉬운 사람 있고 아예 모든 걸 한순간 싹 지워버리는 것이 오히려 쉬운 사람도 있다.

만남이 쉬운 사람은 그 온정주의에 의해 경박해지기 일쑤고,

이별이 쉬운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타인의 그늘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질 수 있으며,

모든 걸 한순간 지워버려 초기화상태로 되돌리는 게 쉬운 사람은 도교적 허무주의에 빠져 잘못하면 자기 생을 망가뜨릴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

인간주의 이데올로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라 나는 이별을 쉽게~단칼에 해치우는 걸 별로 지지하지 않는다.

구태여 말하자면 나는 위의 세번째 스타일에 젤 가까울 것이다.

이별이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해 가는 과정으로만 성립된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그렇고 사람 사이 이별도 그러하다.

이별을 완성해내는 고유한 속도는 천차만별이다.

단칼에 자르고 단단히 상처를 동여맬 수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타고난 기질문제를 오직 나의 기질에게 맞추길 요구하는 건 근원적으로 보면 폭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매멸찬 태도가 상대편에게 죽비로 내려치는 듯한 각성의 효과를 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그러나 의외로 많지 않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별을 받아드리기 어려워 우는 사람이라면 눈물을 닦을 시간을 줘야하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은 그 아우성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어야 죽비의 효과도 나타난다.

보통의 경우, 눈물도 아우성치는 것도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면 이별을 받아드리기 위한 힘든 과정이지 당신을 해치거나 불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시적 불편함을 못 참고 뺨이라도 치는 듯한 제스처로 거두는 효과가 과연 유의미하겠는가.

관계에서 결단력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결단을 맹신하는 사람은 대개 인간의 내밀한 신비성과 비밀, 일테면 도스트앱스키를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가 스토커 수준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똘똘한 마침표는 가급적 문장에서만 사용할 일이다.

매몰차게 굴면 상대편도 마음을 빨리 수습할 거라는 충고도 편의주의를 감추려는 위장일 수 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자신의 좋은 기억까지 매장해버리는 자기모독의 결과를 낳기 쉽다.

단지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분법적 야만성에게 담보된 위험한 세상의 이야기다.

적폐 아니면 반적폐이다.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시작 아니면 끝이다. 중간이 없다.

이별~그 먼 후에 맞이할 새로운 만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 어디에 내다 버렸는가.

기다리지 못한는 나와, 기다리지 못하는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피어난 봄꽃을 보면서 소멸하는 봄꽃의 환영을 볼진대, 나는 늘 이별이 쉽지 않다.

남녀불문, 모든 관계에서 그렇다. 때가 왔다는 걸 알아도 그걸 내 안에 모셔 들여 앉히는데는 시간과 고통이 수반된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받은 이별에의 정보를 가슴에 수용하려면 발효를 위한 썩는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지사이다.

민주적인 내 성품으로 보면 조만간 머릿속 결과를 정돈해 이타적 자세로 가슴에 받아 쟁일 게 틀림없으나 상처를 남보다 깊이 받는 체질이라 그런지 그 과정에서 갈팡질팡 우와좌왕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정도 병이라 하지 않던가. 물론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이런 태도는 우유부단하고 짜증스러울 법 하다.

'찌질이'로 매도될 수도 있고, 배려는커녕 상대편의 무례를 불러올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묻는다.

가까이 지내 온 관계에서 우유부단 갈팡질팡이 전혀 없는 이별이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는 단칼에, 누구는 갈팡질팡하며 시간의 세례를 기다린다. 선택의지라기보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상대편과 정말 친한 게 아니라 줄곧 친한 척 해온 관계라면 이런 차이를 배려할 필요가 없겠지만.

사람은 고통을 뚫어 넘는 각자의 비술서를 갖고 사용하기 마련이다.

이별이 쉽지는 않지만 내 경우, 분열의 어떤 꼭지점에서, 일테면 상대편의 태도 밑바닥에 숨긴 본질 같은 걸 느끼고 나면 한순간 홀연히 모든 게 싹 지워지고 마는 이상한 초기화를 경험한다.

이별의 과정이 일시에 생략되고 곧장 이별의 죽음을 만나는 형국이다.

모든 것이 갑자기 작고 단단한 가시 같은 것, '이별의 주검'으로 갈무리되어 내장되고 마는 것이다.

이별의 감정이 흐르는 물이라면 이별의 주검은 고체의 광물에 가깝다.

상처까지 포함해 이별을 죽은 가시처럼 만들어 쟁이면 무엇에 의해서든 나는 더 이상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죽지 않고 내가 사는 비밀스런 길이 그렇다.

이별없는 인생이 없을진대, 나같은 타잎에게 이런 비술마저 없었다면 아마 오래 전 나는 이별의 생가시에 온몸이 찔려 피 흘리고 죽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어젠 낮술을 마시고 맨발로 뜰을 걸어다니면서 봄꽃에 취해 울었다.

제딴엔 뽐내면서 피어 있으나 그 뽐냄 뒤의 어두운 옹이들과 하찮은 두려움, 소멸을 알면서도 영원성을 놓지 않으려는 야멸찬 욕망, 허세로서의 희망을 나는 봄꽃들에게서 낱낱이 보고 느낀다.거짓말 맹세 거짓말 사랑 같은 것. 내 청춘이 그러했고, 본디 청춘의 본체가 그러하다.


이 봄꽃들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낭떠러지를 곧 만날 봄꽃들 하나하나, 내 눈엔 모두 철없고 또 애처로울 뿐이다.

어찌 봄꽃들 운명만 그렇겠는가. 잘 모르는 모든 당신들 겪는 아픈 이별까지 지금 환히 보인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는 모양이다. 빌어먹을, 나는 왜 이리 눈물이 많단 말인가.

왜 이리 찌질이 쪼다로 태어났는가. 왜 이리 여전히, 떠나온 그 자리 그 요람 속에 있을 뿐인가.

하지만 뭐, 크게 염려할 건 없다. 깊이 들여다 보면 8할이 엄살이다.

당신들이 보지못하는 나의 어느 한쪽 키는 거의 하늘에 닿고 있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

이별의 연속적 단애를 통과하는 일이 삶이거니와, 엄살을 부릴뿐, 아주 큰,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은 의외로 담담히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효용성의 전략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내다버린 존재의 비의적 상징들을 나는 알고 있으며 그 슬픔도 이해하고 있다.

한없이 약하지만 한없이 강한 것이 사람이라면 나야말로 '사람'이다.

가슴을 횡으로 절단하여 보라.

내 안에 쟁여진 화석화된 이별의 가시들을 여럿 볼 것이다.

낙엽지는 가을 저녁, 지천으로 꽃 핀 봄날, 젖은 강과 바람부는 숲, 꾸부정 걷는 노인의 등과 전깃줄 같은 청년의 피돌기 따위를 볼 때마다, 그것들이 시도때도 없이 솟아 나의 내장들을 사방에서 찌르고 지쳐오는 건 사실이다.


아프고 아프다. 그리고, 그러므로 당신들에게 이렇게 엄살을 떤다고 이해하기 바란다.

당신들은 지나치게 참고 있으니까, 참아서 병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라도 나서서 치기어린 엄살과 다감한 손짓으로 당신의 영혼속에 깃들면 좋은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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