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론

심수봉 이야기

낙동대로263 2016. 3. 22. 19:52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포크와 록이 주류를 이뤘던 경연장에서 명지대생 심수봉의 트로트 노래는 파격이었다.

상상을 못했던 트로트 대학생 가수의 출연에 당황하던 관객들은 경쾌하면서도 구슬픈 가락을 담은 그녀의 창작 트롯 곡에 끝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단숨에 '대학 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올랐다.

참가 곡 '그때 그 사람'은 전국을 강타하며 1979년의 최고의 히트곡으로 떠올랐다.
매일 같이 TV,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은 심수봉 열풍이 몰아쳤다.

평론가들은 뒤늦게 '트롯만이 갖는 멋과 맛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국적인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시해 사건의 현장에 연루된 '그 때 그 여인'으로 한동안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 속에 살아가야 했던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본명이 심민경인 심수봉은 공식적으로는 1955년 7월 11일 ,,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신고돼 있지만, 실은 5살 줄여진 나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심정순은 경지에 도달했던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명인이었다.

작은 아버지 심사건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소리꾼이었고
막내 고모 심화영 또한 승무로 1983년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사람이다.
민요 채집가였던 아버지 심재덕은 이대와 숙대에서 국악 강의까지 할만큼 일가견이 있었다.

어머니 장형복은 부친의 제자였다.
배다른 형제를 가져야 했던 가정 환경은 그녀에게 원초적 한의 정서를 남겼다.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아온 그녀에겐 소리꾼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에 서산 극장 악극단의 풍물패가 지나가면 자다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좋아했다.
심수봉은 "당시 트럼펫 소리로 듣던 '타향살이' 가락은 지금도 어린 날의 숨막히던 흥분으로 몰고 간다"고 말했다.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구성지게 부르던 그녀는 동네 아줌마들의 인기 스타였다.
유치원을 다니는 딸 아이의 뛰어난 음악성을 깨달은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서산읍에서 피아노가 있던 단 한 곳이었던 서산초등학교 교감 선생님 집으로 데려 갔다.

심수봉은 교감 선생님의 딸에게 2년 간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음악과 미술, 국어에 재능을 보였다.
음악 책의 악보를 보고 단번에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그녀가 유일했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 후 재혼을 한 그녀의 어머니가 파경을 맞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흑석동으로 올라 와 은로초등학교에 전학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명문 여중 입학을 목표로 과외를 받았다.
당시 과외 공부를 했던 흑석동 언덕의 담임 선생집에서 그녀는 친구들에게

귀신 장난을 호되게 당한 뒤 귀신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신경 인프레'란 병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까지 포기해야 했다.
병세가 짙어진 그녀는 진학을 포기하고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요양을 했다.
당시 그녀의 유일한 벗은 음악을 들려 주었던 라디오.

1년 뒤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지만 치료를 위해 또 다시 2년 휴학을 했다.
심수봉은 "당시 어머니의 종교는 이단으로 지목 받는 신흥 종교였다.
광적인 예배의 소음과 혼돈은 참기 힘든 두통을 안겨주었다"고 고백했다.
휴학을 한 그녀는 다시 무의도로 들어갔다.

심수봉은 해변가에서 어느 대학생 오빠가 기타를 치며 들려주는 '해뜨는 집(House of the Rising Sun)'의 파격적인 가사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 기타 소리를 들으며 충격과 환희를 맛보았다.

 


무슨 악기든 연주하고 싶었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불현듯 어린 시절 그리도 좋아했던 음악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부탁을 해 기타와 교본을 가지고 연습을 시작하며 건강을 회복해 갔다.


그녀는 인천 인화여고에 뒤늦게 입학을 했다.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자 공부보다는 취미 활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어느 날 TV에서 여성 드러머가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여름방학부터 그녀는 삼각지에 있던 음악학원에서 드럼을 정식으로 배웠다.

미8군 아나운서를 했던 배다른 큰언니가 소문을 듣고 송민영 악단의 드러머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개인 지도를 받기 시작한 그녀는 시민회관에서 열린 아마추어 재즈경연대회에 출전을 해 장려상을 수상할 만큼 실력이 붙었다.


음악계에서 쓸만한 드럼주자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자 '밴드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로큰롤을 주로 연주했던 보컬 그룹 '논스톱'의 드럼 주자로 미8군 전용 클럽 무대에 섰다.

이 당시 심수봉은 김수희등과 친분을 맺었다.



이후 남자 드럼머 선배의 조언을 따라 재즈피아노로 전향한 그녀는
1973년 여고 졸업 후 소공동에 위치한 이태리 고급 레스토랑 '라 칸티나'에서
아르바이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는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키사스 키사스',
'베사메 무쵸'와 같은 라틴 노래들을 주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60년대를 풍미했던 밴드 마스터 엄토미씨가
"보광동에서 개인 파티가 있는데 피아노 반주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심수봉은 미조라 히바리의 엔카 몇 곡을 불러 '라 칸티나'의 한달 봉급 5만원의
4배가 넘는 20만원의 거액을 수고비로 받았다.



그 파티는 당시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이 주최한 연회였다.
이후 그녀는 경호실장이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자주 불려 나가며 1975년 박정희 대통령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1975년 초여름 밤 남산 도큐 호텔 스카이라운지. 노래를 하던 심수봉은 최고의 가수 나훈아가 찾아온 것을 보고 멋들어지게 그의 히트곡을 불렀다.

 


이때 그녀의 노래에 감탄한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 갔다.

당시 작업했던 노래는 후에 대히트를 터트린 '나는 여자이니까'.

 

하지만 흥행 여부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던 신세기 레코드가 음반 발매를 지연하자 오아시스로 옮겨 재 취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흙 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데뷔음반 발표시도는 이렇듯 불발에 그쳤다.

1976년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그녀는 뒤늦게 대입준비를 해 숙명여대 작곡과에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를 들었다.

 

 

그래서 후기였던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생긴 대학가요제는 그녀에게 자극을 주었다.

 

 

밤무대의 한정된 손님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노래를 하고 픈 마음이 피어났다. 1978년 27세의 대학 3학년 심수봉은 2회 MBC대학가요제에 창작 트로트 곡 '그때 그 사람'으로 본선에 진출, 심사 위원들과 대중을 경악시키며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하지만 '가창력은 돋보였지만 곡의 리듬이 대학가요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학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올랐다.

내심 대상을 기대했던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날 지구레코드 사장이 음반 취입을 제안해 와 200만원에 전속계약을 맺었다.

함께 출전해 입상하지 못한 곡 중 마음에 들었던 '젊은 태양'을 '그 때 그 사람' 함께 녹음해 데뷔음반 <78년 대학가요제 입상 곡 심수봉. 최현군-지구>을 발표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1979년 심수봉 열풍은 전국을 강타했다.

TV,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에는 매일 같이 그녀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평론가들은 뒤늦게 '트롯만이 갖는 멋과 맛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국적인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심수봉은 ‘이전의 트롯과는 차별되는 심수봉류의 트롯이라는 장르를 열었다’는 평가를 얻어 냈다. 그녀는 1979년 MBC 10대 가수상, KBS신인가수상을 수상하는 정상의 가수로 떠올랐다. 이에 지구레코드는 신인가수 심수봉에게 제미니 승용차를 보너스로 선물했다.

 

 

'그때 그 사람'이 대박을 터트리자 무관심했던 신세기와 오아시스는 '대어를 놓쳤다'며 녹음해두고는 묵혀두었던 '여자이니까' 등을 꺼내 동시에 발매하는 얄팍한 상혼을 보였다. 심수봉의 대표 곡 '그때 그 사람' 은 친구의 병실을 찾아갔다가 그 친구의 남자 친구가 기타를 쳐주는 것을 보고 스케치하여 만든 곡이었다.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심수봉은 1979년 10월 26일 세상을 뒤흔들었던 '10ㆍ26 궁정동 사건'의 현장에 있던 두 여인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감당키 힘든 좌절의 계절이 다가왔다.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 빠진 그녀는 정신적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심령술 도사인 한 도사와의 결혼과 이혼, 정신 병원 감금 등 힘겨운 삶이 이어졌다.

 

 

또한 신 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 30일 3개 TV사와 5개 라디오사는 방송 윤리위를 열어 심수봉을 위시해 남진, 옥희, 나훈아, 태진아, 정훈희, 이수미 등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거나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주어왔다'는 연예인 20여명에게 방송출연금지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 심수봉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켰다.

방송출연금지조치 이후 그녀는 지방의 밤무대에서 더욱 큰 인기를 과시했다.

1982년엔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 출연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79년도에 만든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 때문에 또 다시 활동 제약을 당했다. 노래 제목에 당시 '영부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이 노래는 '올 가을엔 사랑 할꺼야'로 제목을 변경되어 방미가 노래했다.

1984년이 돼서야 그녀의 방송 출연 금지 조치는 해지되었다.

이미 지방 밤업소 사장과 결혼으로 또 한번 인생의 쓴맛을 보았던 그녀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발표했다.

부활의 노래였다.

 

 

이후 애국가요인 '무궁화','사랑밖에 난 몰라','미워요'등 인기퍼레이드가 이어지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3년 그녀는 MBC 라디오 '심수봉의 트롯가요 앨범'의 DJ를 2년간 맡았다.

당시 프로그램의 PD 김호경씨와 그녀는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SBS TV '주병진 쇼'에 출연, 처음으로 10.26 사태에 관한 말문을 열었다.

 

 

이어 1994년 자서전 '사랑밖엔 난 몰라'를 출판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7년 발표한 '백만 송이 장미'는 그녀의 건재함을 과시했던 빅 히트곡.

이후 대학로 라이브 콘서트를 시작으로 그녀는 1999년 힐튼호텔의 데뷔 20주년 기념콘서트 등으로 팬들과의 교감을 이어갔다.

 

 

이후 2001년 그녀의 곡 '사랑밖에 난 몰라'가 영화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엔딩 곡으로 쓰이며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과연 심수봉'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듯 한의 정서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창작 트로트 곡들은 '심수봉류 트롯'이라는 독창성을 부여 받았다. 대학 가요제의 이단아 심수봉은 온갖 좌절을 딛고 이제 국민 가수로 우뚝 솟아 있다.

 

 

그녀는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트로트 아티스트라 평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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