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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이라는 나라 ...

낙동대로263 2015. 9. 18. 22:24

 

 

 

[한겨레][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시간여행 같았다.

운동장 두 개쯤 붙여놓은 부탄 파로공항에서 뜬 비행기가 방콕을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리둥절했다.

석달차 부탄 주민인 내게 한국은 정말 없는 게 없는 별천지였다.

화장실의 물도 폭포수처럼 잘 내려갔다. 차도에 구멍도 없다. 부탄 우리집 창문은 다 입 돌아가 있는데 여긴 창틀에 창문도 딱딱 들어맞는다. 부탄 계단은 각 층계 높이가 제각각이라 그야말로 매 순간 깨어 있지 않고는 발을 삐기 십상인데 한국 층계는 연예인 이처럼 고르다. 특히 먹을 게 천지다. 눈이 뒤집힌다.

 

 


부탄에서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채식주의자였다. 해산물은 진귀하다.

슈퍼에서 한 번 방콕에서 수입해 온 새우 한 봉지 봤다. 정육점에 가면 생선이 좀 있는데 그 문 앞에서 배회하다 그만뒀다.

한국에선 고기가 원래 생물이었다는 걸 말끔히 잊게 포장해, 샴푸나 고기나 다 상품 같다.

여기 정육점에 매달린 고기들은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나 먹어라' 꾸짖는 형체다.

그 고기들 틈바구니에서 생선 대여섯 마리가 마지막 비린내로 안간힘을 쓰며 '나 생선이야' 악을 쓰고 있다.

나머지는 인도에서 건너온 말린 생선들인데 나무껍질 같다. 고기도 영 안 당긴다. 역시 인도에서 수입해 온 묻지마 고기다.

어떻게 도축되고 운반됐는지 죽은 고기만 알 일이다.

이러니 나는 만날 유튜브 요리 프로그램을 뒤지며 침을 질질 흘렸다.

 


부탄 사람들이야 당치도 않은 소리라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부탄은 식도락계의 지옥이다.

일단 사람들이 뭘 죽이는 걸 꺼린다. 고기고 생선이고 먹긴 잘 먹는데 제 손에 피는 안 묻히겠다는 거다.

죄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생에 다른 생명 괴롭히다간 다음 생에 피 보는 수가 있다.

 

 

그들 생각엔 생물로서 가치는 파리나 인간이나 거기서 거기다.

내가 일하는 단체 건물 천장에 거미줄이 주렁주렁 달렸다. 손이 잘 안 닿길래 키 큰 부탄 청소년에게 부탁했더니 난감해했다.

거미가 살고 있다는 거다. 외국인인 나 혼자 죄 다 받기로 하고 거미 소탕했다.

파리도 안 잡고 유인하기도 한다.

천장에 물을 담은 비닐봉지와 나뭇가지를 걸어두면 파리가 그리로 간다는데, 내가 보기에 파리는 천장 나뭇가지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나만 보면 환장해 쫓아다닌다.

한 부탄 공무원은 이왕 먹을 거 인도에 돈 퍼주지 말고 알고나 먹자며 양식장 추진했다가 가족한테 의절당했다.

 


'그저 해발 3000m는 돼야 뭐 동산이라 할 수 있는' 동쪽엔 아직도 면사무소 가려면 두 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산골동네가 많다. 기른 옥수수는 자급자족용이다. 그쪽 동네 갔다 3박4일 삼시세끼 '에마다치'만 주야장천 먹었다.

부탄 치즈에 고추를 왕창 투하한 이 요리는 부탄의 대표 음식인데 이밖엔 고르고 말 것도 없다.

 


그렇게 금욕에 시달리다 보니 그리운 것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해물탕이다. 한우다. 아구아구 터지게 먹어주리라. 첫 약속은 초밥집으로 잡았다.

점심특선 9000원인데 갓 잡은 생선의 살점을 얹은 초밥은 때깔도 기막히다.

그 초밥집 앞엔 작은 어항이 있다. 그 속에 광어가 대여섯 마리 포개져 바닥에 깔려 있었다.

광어는 어항 바닥의 흠집 같다. 목숨만 붙여놓은 쪽방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로 싱싱하게 먹어주겠다는 의지가 덕지덕지 붙은 어항이다.


조금 더 맛있게 먹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광어를 이토록 괴롭혀야 할까?

꼭 그렇게까지 맛있어야 할까? 3초 생각했던 거 같다.

성찰은 약하고 식욕은 강하다.

내 공주 혀는 인정이 없다. 좌라락 나온 초밥을 보니 광어야 지 사정인 거다.

나는 초밥 9개를 한순간에 들이켰다.

내 식탐은 설사도 못 막았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맛있는 걸 먹어야 할까?


그러곤 눈먼 쇼핑을 했다. 수도 팀푸는 다른 부탄 도시에 비하면 메가쇼킹빅시티다.

다른 도시엔 대로에 건물 대여섯 채 있고 땡이다.

그 큰 팀푸에 피자집 두 개 있다. 캠코더 사려고 온 팀푸를 다 뒤졌는데 결국 못 건졌다.

한 가게 창고 구석에서 먼지 뒤집어쓴 파리채를 발견하고 남편과 실로 오랜만에 동지의 기쁨을 느꼈더랬다.

그 파리채를 산 날 우리는 파리 한 마리 잡을 수 없을 만큼 에너지 방전됐다.


그러다 한국에 오니 쇼핑에 날 새는 줄 모른다.

한국 드라마에 꽂힌 부탄 친구들이 부탁한 것도 산더미다. 안 될 말씀, 지금 내 물건으로도 가방 째지게 됐다.

그것도 총알배송이다. 한국에 3주 머무는 동안 친구들보다 택배 아저씨에게서 더 많은 문자를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사악할 정도로 편한 거다.

가끔 클릭질을 해대면서도 궁금했다. 대체 뭐가 얼마나 많아야 할까? 얼마나 편해야 할까?


서울에서 또 진탕 먹고 용인으로 돌아오는 길, 평일 밤 12시가 다 됐다. 좌석버스가 도착했다. 자리가 꽉 찼다.

사람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있었다. 네 살짜리 딸을 둔 친구는 야근이 일상이다.

회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의 날이라며 오후 6시에 퇴근하게 해주는데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없는 것 투성이 불편한 부탄 팀푸에서 러시아워는 오후 5시다. 얄짤없이 퇴근한다.

밤이면 거리는 개 차지다. 인간은 잔다. 그런데 이 편한 한국에서 인간은 밤에 잠도 못 잔다.

너무 편한데 너무 피곤한 이건 대체 뭘까? 광어를 먹는 우리가 또 다른 우리에게 광어인지도 모르겠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50917104011552&RIGHT_LIFE=R10